◈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노동동 고분군

蔥叟 2006. 5. 29. 05:30

경주 노동동 고분군

 

   노동동고분에는 봉황대를 비롯하여 금령총, 식리총 등의 고분이 있다. 봉황대는 단분으로서는 경주의 신라고분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봉황대라는 이름은 신라의 멸망과 관련된 전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어느 날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한 풍수가 찾아와서 “신라의 서울은 지형이 배모양과 같아서 언젠가는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를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하려면 신라 서울의 배를 아주 침몰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소인에게 맡겨주십시오” 했다. 고려 임금은 그렇게 할 것을 승낙했다. 풍수는 신라임금 앞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신라 서울의 지리는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겼기 때문에 천년동안 크게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지나서 봉황이 둥우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신라 임금은 나라 형편이 기울어가고 있는 터라 걱정이 되어 “그렇다면 그 봉황새를 붙잡아 둘 방법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풍수는 “좋은 수가 있습니다” 하고 얼른 대답을 하였다. “봉황새 둥우리 같이 생긴 서울 장안에 둥글둥글하게 큰 알을 많이 만들어 놓는다면 봉황은 알을 두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신라 임금은 그럴듯하여 곧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서울 한가운데에 둥글둥글하게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 모양을 수 없이 만들어 놓았다. 풍수가 보았을 때 이것은 떠나가는 배 위에 많은 짐을 싣는 격이 된 것이었다. 모든 상황이 만족해지자 알 모양이 가장 많이 만들어져 있는 미추왕릉 부근의 밤나무 숲속에 우물을 파 놓고 고려로 도망을 갔다. 이것은 짐을 많이 실은 배 밑바닥을 뚫어놓은 격이 되었으니 그 후로 신라는 영영 일어서지 못했다고 전한다.


봉황이란 시내의 수많은 고분을 일컫는 것으로 이때부터 고분을 봉황대라고 불렀으며 밤숲에 있는 우물은 율림정(栗林井)이라 하여 미추왕릉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언양으로 가는 관도(官道)가 지나던 곳으로 봉황대에는 일제시대까지 성덕대왕신종이 걸려있기도 하였다.

 

*봉황대

 

*봉황대

 

*봉황대

 

*봉황대

 

*봉황대

 

금령총은 두 번째로 금관이 출토된 고분인데  4단의 직각수지형 장식이 달린 것으로서 3쌍의 드리개가 늘어뜨려져 있고 그 중의 한 쌍에 구슬을 감입(嵌入)한 금령(金鈴, 금방울)이 장식으로 달려 있어 이 무덤을 금령총이라고 한다.

신라고분 가운데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최고급의 부장 유물이 나온 점으로 보아 피장자는 당시 최고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큰칼의 장착으로 보아 피장자는 남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금관의 크기로 보아 약 16세 정도의 소년이 쓰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것은 왕이 아니더라도 금관을 쓸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 고분에서는 기마인물형토기, 배모양 토기와 장식토기가 11점이 출토되었다. 기마인물형토기는 당시의 기마 풍습 및 마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령총

 

*금령총

 

 식리총은 금동으로 만든 신발바닥이 출토되어 식리총(飾履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신발바닥에는 귀갑형 윤곽 안에 각종 괴수의 타출문이 새겨진 것으로 역시 중앙아시아계통이다.

 

*식리총

 

*식리총

 

 

<2006. 5. 15>

'◈한국문화순례◈ > 서라벌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암곡 무장사터  (0) 2006.05.31
경주 노서동 고분군  (0) 2006.05.30
경주 전김양묘  (0) 2006.05.28
경주 전김인문묘  (0) 2006.05.27
경주 두대리 마애삼존불  (0) 2006.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