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노서동 고분군

蔥叟 2006. 5. 30. 10:35

경주 노서동 고분군

 

   노서동 고분군에는 최초의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을 비롯하여 역시 금관이 출토된 서봉총, 그리고 서봉황대와 쌍분인 143호분, 마총, 쌍상총, 호우총 등의 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관총(金冠塚)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고분이다. 금관총은 1921년에 민가의 담장을 고치다가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어 단 4일에 걸친 발굴을 완료하여 세계 고고학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신라시대의 적석목곽분에서 금관이 출토된 최초의 무덤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계획적이고 과학적인 발굴을 하지 못하고 비전문가의 손에 의해 마구 파헤쳐짐으로서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쉬운 것이었다.

 

*금관총

 

*금관총

 

*금관총

 

봉총

표형분 형태의 적석목곽분으로 남분은 규모가 작고 북분은 크다.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황남대총에서와 같이 여자의 무덤인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되고 남자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의 수준이 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회가 남녀 불평등구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봉총 금관에는 봉황장식이 달려있어 발굴당시 한국인들은 봉황총(鳳凰塚)으로 명명할 것을 주장했지만 일본인들은 스웨덴(瑞典)의 아돌프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여 서전총(瑞典塚)으로 이름짓고자 하여 두 가지 이름을 합쳐서 국적불명, 족보미상의 서봉총(瑞鳳冢)으로 이름지어졌다. 민족의 문화유산도 주권이 없을 때 운명이 극명해짐을 느끼게 해준다.

또 1935년에는 평양박물관에서 서봉총 출토 금관을 비롯하여 허리띠와 장식, 목걸이, 귀걸이 들 중요 출토품 일체를 평야지역의 각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지방의 유지들에게 특별히 관람시켰다. 그런데 특별 전시를 끝내고 서울박물관으로 돌려보내기 전날, 관장을 비롯한 평양박물관 직원들이 진열품을 몽땅 들고 기생집으로 가서 당시 유명한 평양기생 의 머리에 이 금관을 씌우고 허리띠와 목걸이 등을 장식하게 하고는 술을 마시고 즐겼던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당시 신문의 사회면에 상세하게 실린 기사가 남아있다. 주권 없는 국가의 문화유산에 대한 비참한 모습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서봉총

 

*서봉총 발굴기념비

 

*서봉총. 앞의 평탄한 부분. 쌍분은 134호분

 

*서봉황대

 

*서봉황대

 

*서봉황대

 

*서봉황대

 

*서봉황대 적석흔적

 

*서봉황대 능선

 

*서봉황대 능선

 

*서봉황대에서 바라본 봉황대

 

*서봉황대 정상부 함몰흔적

 

*서봉황대에서 바라본 황남동고분군

 

*서봉황대에서 본 노서동고분군

 

*서봉황대에서 바라본 남산

 

*서봉황대에서 바라본 노동동고분군

 

*서봉황대에서 바라본 황남동고분군

 

*서봉황대에서 바라본 노서동고분군

 

*134호 표형분 능선

 

*노서동고분군

 

*노서동고분군

 

*134호분 능선

 

*134호분 능선

 

*134호분 능선

 

*134호분 능선

 

*쌍상총

 

마총, 쌍상총

노동, 노서동 고분군에서 발견되는 석실분으로 장법이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고분이다. 마총은 1920년 수습발굴 때 말뼈(馬骨)와 안장(鞍裝)틀 조각이 출토되었다하여, 쌍상총은 돌방(石室)의 중앙에 자연석과 벽돌을 이용한 널받침이 설치되어 있는데 두 개의 시상대가 나란히 놓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들 무덤을 쓸 때 고려하는 사항은 세 가지이다. 첫째 생각할 문제는 장법(葬法)이다. 매장이냐 혹은 화장이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 문화는 거의 바뀌지 않고 선대의 예를 따르게 된다. 둘째는 장지(葬地)를 결정해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선산이나 혹은 남편 곁에 혹은 부인 곁에 묻게 되는데 이문제도 잘 바꾸지 않는다. 셋째는 무덤 축조 방식인데 이문제도 3세대 정도가 지나가고 사회, 경제적으로 여건이 크게 변해야만 바뀌게 된다.

신라시대에도 6세기초에 불교가 전래되고 내세관이 바뀌면서 적석목곽분에서 석실분으로 묘제가 바뀌고 평지에서 산지로 장지가 옮겨가지만 일부는 평지를 그대로 고집하였다. 이처럼 문화라는 것은 획일적이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다.

 

*마총

 

   호우

   문화재와 관련된 용어는 참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한문 투의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인데 하루빨리 좋은 우리말 용어를 만들어 써야 할 것이다.

   죽음과 무덤에 관련된 용어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황제의 죽음을 붕(崩)이라고 하며, 제후의 죽음을 훙(薨)이라 하며 일반인의 자연사(自然死)를 졸(卒)이라고 하며 비정상적인 죽음을 사(死)라고 한다. 임금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며 왕과 왕비 이외의 무덤을 묘(墓)라고 하며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덤을 총(塚)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고고학계에서 잠정적 시대구분으로 쓰는 학술용어로 고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까지의 무덤에만 쓰이고 있다.

호우총은 현재 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청동호우가 출토된 무덤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호우에는 #문양과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盂十)"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명문의 을묘년(乙卯年)은 AD415년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볼 때 이 호우는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복호가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아 복호의 무덤이라는 설과 당시에 경주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대에서 사용하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문양은 소설가 최인호씨가 수년동안 그 의미를 추적하여 광개토대왕의 상징문양이며 백두산의 천지를 상징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최근 일본에서 벽사문양(酸邪文樣)으로 밝혀졌다.

 

*호우총

 

 

<2006.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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