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암곡 무장사터
일반적으로 절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주로 불교 경전 속에 등장하는 이름을 택하거나 인도나 중국에 있는 사명을 그대로 모방하는 일도 많이 있다. 기림사(祈林寺), 창림사(昌林寺), 법림사(法林寺), 보림사(寶林寺)와 같이 수풀림(林)자가 들어가는 사명은 인도의 기원정사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경우이다. 기원정사(祇園精舍)는 기타태자의 숲에 세워진 절을 의미하는데 숲은 당시에 스님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또 경주에는 왕실을 지칭하는 사명도 많이 있었는데 황룡사(皇龍寺), 분황사(芬皇寺), 황복사(皇福寺), 사천왕사(四天王寺), 봉성사(鳳聖寺) 등이 그 절들로서 황실(皇室)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 원찰(願刹)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장사(鍪藏寺)는 이러한 사명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자의 의미를 그대로 풀이하면 무기를 감춘 절이라는 의미인데 삼국통일후에 전쟁 때 쓴 무기를 묻었다거나 왕건이 전쟁 때 쓴 무기를 묻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지만 기록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이야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무장사와 미타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서울 동북쪽 20리쯤 되는 암곡촌(暗谷村)의 북쪽에 무장사가 있다. 이 절은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 의 아버지이자 효양 대아간(孝讓大阿干)으로 추봉된 명덕대왕(明德大王)이 그의 숙부 되는 파진찬(波珍湌)을 추모하여 받들기 위하여 세운 절이다.
…중략…
절의 윗녘에는 미타를 모신 옛 전각이 있다. 소성왕비(昭成王妃)인 계화왕후(桂花王后)는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창황스럽고도 지극히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이 아프던 나머지 살았을 적의 아름다운 행적을 죽어서 드날리고 그의 명복을 빛나게 하고자 생각하였다. 이때 서방에 미타라고 부르는 큰 성인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고 받들면 잘 구원하여 와서 맞아준다는 소문을 듣고 왕비는, “이 말이 참말일진대 어찌 나를 속이리요!” 하고 즉시 자기가 입는 화려한 의복을 희사하고 궁중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털어서 이름난 제인바치들을 소집하여 미타상 하나와 아울러 따르는 귀신 무리들을 만들어 모실 것을 지시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 늙은 중 하나가 있었는데 문득 꿈에 신선같은 사람 하나가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편을 향하고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보고, 이곳이 필시 부처님이 머물던 곳이라고 생각했으나 마음속에 감추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곳은 바윗돌이 우뚝 솟고 개울물이 빠르게 부딪쳐 흐르는 곳이므로 목수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다들 좋은 터가 못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급기야 터를 개척하자 평탄한 곳을 얻어서 큰집을 세울 만하고 아주 신령스러운 터나 다름없으므로 보는 자들이 깜짝 놀라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래에 와서 불전은 무너졌으나 절만은 남아 있으니 세간에서 전하기는 태종이 삼한을 통일한 이후 병기와 갑옷들을 이 골짜기 속에 간직해 두었다하여 이 때문에 무장사라고 이름지었다.
<삼국유사 무장사 미타전(鍪藏寺彌陀殿)조>
조선후기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는 영조 때 무장사 비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하를 보냈는데 노스님의 안내로 비편을 발견했다.
19세기는 청조의 문화가 동점(東漸)하던 시기인데 이대의 첨단학문은 고증학이었다. 고증학의 핵심연구방법은 금석문 연구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금석문을 판독하고 해석하는 일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비문의 일부분을 탁본하여 마음에 드는 부분을 오려서 서첩(書帖)을 만들어 글씨교본으로 삼았다. 그것이 바로 조선 유일의 탁본집인 낭선군(郎善君) 이우(李俁)의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이다. 이우는 비문들을 모두 부분적으로 탁본하여 제자들에게 서체를 가르쳤다. 다시 말해서 비문의 내용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1800년대에 들어와 청조의 문화가 점차 난숙해지면서 내용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때 추사 김정희는 청의 옹방강, 옹방원 등과 교류하면서 금석문에 심취해 있었다. 한양에서 금석문을 찾아다녔고 북한산에서 진흥왕순수비도 발견했다. 여러 가지 비문을 탁본하여 중국에 보냈는데 이때 중국에 보낸 비문의 탁본을 모아서 「해동금석서(海東金石書)」를 만들어 역으로 조선에 보내오기도 했다.
조선에서 보내온 비문의 탁본을 살펴본 옹방강(翁方綱)은 해동 최고의 금석문은 왕희지체(王羲之體)를 집자(集字)한 무장사비문이라고 했다. 추사는 31세때 경상도 관찰사인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 온 길에 경주에 들러 무장사에 찾아왔다. 무장사에서 그는 비문을 발견하였는데 비편은 콩을 가는 갈돌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추사는 또 다른 비편 하나를 찾아 자신의 조사기(調査記)를 새겨 놓았는데 그후에 또 비평이 없어졌다 일제시대에 다시 발견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군위 인각사의 보각국사 비문, 황복사 비문도 모두 왕희지체(王羲之體)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수려한 계곡길 무장사터 가는 길
*수려한 계곡길 무장사터 가는 길
*수려한 계곡길 무장사터 가는 길
*수려한 계곡길 무장사터 가는 길
*수려한 계곡길 무장사터 가는 길
*수려한 계곡길 무장사터 가는 길
*수려한 계곡길 무장사터 가는 길
*푸른 숲속의 무장사터
무장사터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신라의 삼층석탑의 양식을 하고 있으나 층급받침이 두께가 얇아지고 있어 신라하대에 세워진 석탑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층급받침의 두께가 더욱 얇아지고 첫 번째 층급받침의 폭이 길어진다. 이 탑에서 또 특징적인 것은 보통 상층기단에는 우주와 탱주가 새겨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탑에는 우주와 탱주가 생략되고 대신 각면마다 2구씩의 안상문(안상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안상문은 성덕왕릉의 상석에 최초로 나타나는 조각인데 일인학자들은 귀신의 눈으로 해석하는데 비해 우리 나라에서는 눈안(眼)자가 들어있는 것과 관련하여 투각(透刻)된 곳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을 모방하여 현재 경주박물관 뜰에 옮겨진 남산의 승소골 삼층석탑은 상하층 기단과 1층몸돌에까지 안상문을 새기고 1층몸돌에는 안상문 속에 사천왕상까지 새겨 놓았다. 안상문은 절대연대를 가진 유물이 많이 있고 문양의 수와 모양새에 계통이 있어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무장사터 삼층석탑
*삼층석탑
*삼층석탑
*석탑 기단부
*하층기단
*상층기단의 안상
*깨어진 몸돌
*삼층지붕돌과 노반석, 보주
*지붕돌 층급받침
*풍탁공
*풍탁공
용두화된 머리는 떨어져 없어졌고 이수도 반쯤 깨어진 채로 쓰러져 잇는데 귀부와 이수 모두 태종무열왕릉비에 비하여 조각솜씨가 많이 뒤떨어졌으며 제액(題額)도 마모가 심하여 읽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귀부의 비신받침 옆면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귀부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것으로는 거의 유일한 예에 속하는 희귀한 것이다. 신라의 귀부는 모두 남향을 하고 있는데 이 귀부는 서향으로 앉아있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머리가 떨어진 용두(龍頭)의 목에는 비늘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숭복사비 귀부의 선행양식에 속하는 본격적으로 용두화된 머리를 가진 최초의 귀부인 것으로 판단된다.
*아미타사적조상비 쌍귀부
*쌍귀부
*쌍귀부
*귀부 앞발
*이수 뒷면
*이수 앞면
*십이지신상(쥐)
*십이지신상(소)
*십이지신상(호랑이)
*십이지신상(토끼)
*십이지신상(용)
*십이지신상(뱀)
*십이지신상(말)
*십이지신상(양)
*십이지신상(원숭이)
*십이지신상(돼지)
*석등 지붕돌
*석등 지붕돌
*석등 지붕돌
<2006.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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