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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의 전생 마을 - 경주 운대리 부운촌

蔥叟 2017. 7. 28. 08:17

김대성의 전생 마을 - 경주 운대리 부운촌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은 두번의 생을 살았다. 전생과 현생을 신라 땅에서 살았다. 전생은 모량리(부운촌)에서 살았고 현생은 서라벌 왕경에서 살았다. 그런데 김대성이 전생을 살았던 곳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조에 나오는 전생의 김대성이 牟梁里의 가난한 여인 慶祖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리고 일연은 모량리 뒤에 註를 달아 '一昨 浮雲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부운못

 

모량리(牟梁里, 浮雲村이라고도 한다-현재의 운대리로 추측하기도 한다)의 가난한 여자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편편하여 성처럼 생겼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하였다. 집안이 궁색하여 길러내기가 어려웠으므로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품팔이를 하였는데 그 집에서 밭 몇 묘를 나누어주어 의식(衣食)의 밑천으로 삼았다. 이때에 덕망 있는 중 점개(漸開)가 흥륜사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배설코자 복안의 집에 와서 권선을 하였더니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하기를, “신도님네 시주를 좋아하시니 천신이 언제나 보호하시리. 하나를 시주하면 만 갑절을 얻으리. 안락을 누리고 수명을 길게 되리라” 고 하였다.

 

대성이 이것을 듣고 뛰어들어와 그의 어머니께 말하기를, “내가 문간에서 중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갑절을 얻는다고 하더이다. 생각건대 우리가 전생에 일정한 적선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다. 이생에서 또 시주를 않다가는 오는 세상에서 더욱 가난할 것이니 내가 품팔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후생의 과보를 도모함이 어떠리까?” 라고 하매 어머니가 “좋다!” 고 하여 점개에게 밭을 시주하였다.

 

얼마 못 되어 대성이 죽었는데 이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서는 하늘로부터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다!” 고 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사람을 시켜서 모량리를 뒤졌더니 과연 대성이 죽었다.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던 한날 한시에 그 집에서는 아기를 배어 낳으니 아기가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이레 만에야 펴니 "대성(大城)"이라고 새긴 금패쪽을 쥐고있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짓고 그의 예전 어머니를 이 집으로 맞아 함께 봉양하였다.

 

▲부운못

 

▲부운못

 

아이가 장성하매 사냥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묵더니 꿈에 그 곰이 귀신으로 화하여 시비를 걸어 말하기를, “네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으리라!”고 하니 대성이 무서워 떨면서 용서를 빌었다. 귀신이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절을 세울 수 있겠느냐?”고 하여 대성이 그러겠다고 맹세하고 깨어보니 땀이 흘러 요를 적셨다.

 

이로부터 그는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장수사(長壽寺)를 곰을 잡았던 자리에 세웠다. 이로 하여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로운 결심(悲願)이 한결 더하여 곧 이생의 양친을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서는 석불사(石佛寺)를 세워서 신림(神琳), 표훈(表訓) 두 스님을 청하여 각각 살게 하였으며, 부모의 소상들을 성대히 세워 양육한 은혜를 갚았다.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를 한 것은 또한 드문 일일 것이니 어찌 착한 시주의 영험을 믿지 않겠는가!

 

대성이 장차 석불을 조각코자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석불을 안치할 탑 뚜껑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토막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통분하면서 잠도 들지 않고 있던 차에 천신이 밤중에 강림하여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은 막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쪽 고개로 내달려가 향나무 불을 피워서 천신을 공양하였다. 이 때문에 이곳을 향 고개(香嶺)라고 하였다. 저 불국사의 구름다리나 돌탑이나 돌과 나무를 새기고 물리고 한 기교는 동방의 여러 절들로서는 이보다 나은 데가 없다.

 

<삼국유사 대성효 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조>

 

▲부운못

 

▲부운못

 

모량리는 지금 건천읍에 모량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러나 모량은 신라 당시 건천과 서면일대를 지칭하던 모량부를 지칭하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히려 모량리 뒤에 주로 기록한 부운촌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았던 마을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그럼 현재 부운촌이란 지명이 남아있을까? 바로 경주시 서면의 운대리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운대리이지만, 그 속에는 浮雲이란 이름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현재 雲臺里는 군실/군곡(裙谷)이라 불리는 운대1리는 연대는 확실히 알수 없으나 옛날 月城金氏가 이마을을 開拓할 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용바위산의 모습이 옛여인들이 입던 한복의 바지처럼 생겼다하여 洞名을 군실 또는 裙谷이라 칭했다고 한다. 또한 운대2리는 부운/운곡/운대라고 불리는데 浮雲臺 밑에 있는 마을로 新羅 善德(일설에는 眞德)여왕이 봉황이 날아들것같은 이곳의 산세와 그 아래 맑은 호수의 아름다움을 듣고 유람차 친히행차하시어 하루를 즐기셨다하며 뒷날이를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앞산에 浮雲臺라는 연꽃 무늬의 받침대를 받친 기념대를 세웠으며 또 여왕께서 행차하실때는 기이하게도 채색구름이 아름답게 떠있었기 때문에 浮雲臺라 부르기도 하여 동명을 부운(浮雲)또는 운곡(雲谷)이라 했다한다.

 

▲부운못

 

▲부운못

 

이 마을에 있는 저수지 이름이 부운못이고, 못 근방이 부운이라 불린다. 경주읍지에도 浮雲이라고 적혀있다. 조선후기 기록인 경주읍지에 지명이 나온다면, 요즘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부운이란 지명이 8세기 전반(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것이 8세기 중반이니까, 설화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의 전생은 8세기 초 또는 전반이 된다)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전해내려왔다는 것이 될까? 최소한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던 23세기부터 지금가지 그 지명이 살아 내려왔다고 하는 것이 바르다. ‘一作浮雲村이라는 주를 일연이 붙인 것이 아니고, 일연이 참고한 기록으로부터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저본의 기록자가 살던 시대로부터 지금가지 전해졌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략 통일신라시대부터 부운이라는 지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커진다. 사람들이 발붙이고 농사지으며 대물려 살아온 곳, 당 이름이 가진 참으로 끈질긴 생명력이다. 사실 그 자체를 정확히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바로 이 마을이 김대성이 전생에 살던 곳으로 알려지고, 그렇게 오래도록 입에서 입으로, 또 기록을 통해 전해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정도 만으로도 한 번쯤 찾아볼 가치를 충분히 가지는 것이 아닐까.

 

▲부운못

 

▲부운못

 

 

 

<2017.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