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구황동 폐왕릉

蔥叟 2017. 8. 6. 12:03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보문동 폐왕릉

 

1400여년 전 신라 왕릉의 대형 석물들이 최근 경주 낭산 기슭에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낭산 동북쪽 황복사터 부근의 경작지에서 발굴된 신라 왕릉급 무덤의 대형 석물 40여점이 옛 원형대로 아귀를 짜맞춰 이어놓았다. 잘게 깬 돌들을 펴놓고 그 위에 복원한 석물들은 신라 왕릉의 얼개와 축조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지름 22m에 달하는 왕릉의 전체 규모는 물론 탱석, 면석, 지대석, 상대갑석 등 봉분 둘레를 싸면서 망자의 혼을 지켰던 신라 석물들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치밀한 수학적 곡률 계산에 따라 면석과 상하대 갑석의 앞면을 부위에 맞춰 둥그런 원호의 곡면으로 다듬는 ‘라운딩 기법’을 구사하여 배치하였다.전체 석물들이 다 수습된 것은 아니지만, 발굴된 석물들을 맞춰 보니 봉분을 지탱하는 탱석과 둘레를 싸는 면석이 각각 36개씩 딱 들어맞게 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고도의 수학 지식이 뒷받침된 신라인의 건축·토목 기술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석물들은 신라 34대 효성왕(737~742)의 왕릉을 두르려고 만들었던 호석 시설의 일부로 보인다. 공사가 중단되면서 한동안 방치됐으며 이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 관청 등의 건물 기반재 용도로 달리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신자였던 효성왕이 유언대로 유골을 화장함에 따라 왕릉 공사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무덤을 조성하려 한 터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애초 석물이 발견된 유적 옆 공터였던 현재 복원 현장을 왕릉 터로 지목하고 조사했으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다. 개당 1톤에서 1.5톤에 달하는 무거운 석물들을 먼 곳에서 옮겨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유적에서 좀더 동쪽에 있는 보문들 어딘가에 만들다 만 왕릉 터가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이 발견된 전(傳)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동쪽으로 약 135m 떨어진 지점의 논 경작지를 조사한 결과 홍수로 파괴된 신라왕릉과 면석, 탱석 등 관련 석재유물이 오래 전부터 지상에 노출돼 있었다. 신문왕릉이나 성덕왕비의 소덕왕후릉, 민애왕릉 등과 비슷한 급의 폐왕릉지 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의상대사의 탑돌이와 관련있는 절인 황복사의 목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지다.

 

추정 고분지에서 확인된 석재 유물은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미완성 석재 등이다. 신라 왕릉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주변으로 8~9세기가 중심연대인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너비 16~17m 도로 등이 드러났다. 이와 함께 연화보상화문수막새, 도깨비 기와, 신라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과 ‘정원사(鄭元寺, 鄭은 추정명문)’명 명문기와 등 유물 300여점이 출토됐다.

발견된 갑석과 지대석, 면석과 탱석으로 계산한 왕릉의 지름은 약 22m다. 전(傳) 경덕왕릉(765년)과 비슷한 규모다. 왕릉 관련 석재 다수가 미완성으로 출토된 점, 후대에 조성된 8~9세기 건물지 시설에 재활용된 점,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확인되지 않은 점,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나간 점 등 여러 정황으로 판단할 때 사전에 왕릉을 준비하다가 축조공사를 중단한 가릉 석물로 추정된다. 가릉의 주인공은 발굴조사 결과와 십이지신상 형식으로 볼 때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742)으로 추정된다.

 

가릉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신라왕경에서 확인되는 주택이나 불교 사원 건축과는 차이가 있다. 관청이나 특수한 용도의 건물로 추정된다. 불교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았고 관청명인 듯한 ‘습부정정’, ‘습부정정’이라고 적힌 명문기와 등의 유구로 봐 신라 왕경의 행정 조직체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습비부(習比部)와 관련된 관청이었을 수도 있다.

도로유구는 현재까지 신라왕경에서 조사된 다른 도로보다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잘 만들어졌다. 왕경의 남북대로와 동서대로의 너비가 16~17m 정도이므로 왕경의 방리(坊里) 구획에 따라 연결된 도로이거나 황복사지 사역, 즉 절이 차지하고 있는 구역이나 왕릉을 조성하려고 미완성 대형 석재를 이동시키는 특수 목적으로 가설됐을 가능성도 있다.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추정왕릉 석재

 

 

 

<2017.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