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월악산에 위치한 덕주사 법당지의 동쪽 암벽에 부조되어 있는 고려시대 마애불입상. 보물 제406호. 높이 13m. 거대한 마애불상의 양 어깨 위에는 목조전실이 있었던 가구공(架構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얼굴 부분은 약간 도드라지게 조각되었으나 두 손이나 신체 표현 및 법의의 옷주름 등은 선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어 전체적으로 치졸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길고 턱이 진 얼굴에는 양감이 별로 없고, 목부분의 표현이 생략되어 얼굴과 몸체가 거의 붙어 있으며 가슴 쪽으로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가 양 다리 위로 갈라져 표현된 타원형의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법의 형식이 도식화된 것으로, 만복사지석불입상 과 같은 고려시대 석불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가슴 앞으로 올린 두 손은 유달리 크고 투박한 느낌을 주며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이 맞대어 있고, 왼손은 손등이 밖으로 향해 있어 아미타불의 구품인(九品印)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의자락 밑으로는 군의(裙衣)의 옷주름이 규칙적인 세로선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옆으로 크게 벌린 두 발이 거대한 몸체를 안정감있게 받치고 있다. 이 마애불상은 넓적한 얼굴에 볼륨감이 거의 없는 평면적인 신체표현이나 도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치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며,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마애석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마의태자의 여동생인 덕주공주가 이 불상을 조성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아버지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된다. 일행은 그곳에서 야영을 하며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날 밤 마의태자는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은 왕자에게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西天)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며,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億兆蒼生)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현몽하였다 한다.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생각하고 두 남매는 계곡 물에 목욕재개 하고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배례 한 뒤 다음날 서쪽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된다. 일행이 서쪽으로 가며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일행은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며, 최고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를 찾아 석불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사다.
공주는 그대로의 삶, 불사에 전념하며 구도의 길을 걸음에 만족하였으나 왕권을 계승하지 못하여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동생인 덕주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금강산을 향해 떠난다.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져 혈혈단신이 된 공주는 출가하여 절에 몸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의 애틋한 부정을 그리워하고 오빠인 태자의 건승을 서원하며 일평생을 살았다 한다.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마애여래입상
<2015.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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