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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상당산성

蔥叟 2015. 9. 22. 08:46

청주 상당산성

 

청주 상당산성(淸州 上黨山城)은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산성이다. 197010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상당산성은 둘레가 4.1km, 높이 2~4m, 면적이 704,609에 달하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상당산의 8부 능선에서 시작해 성내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동서 산맥의 등성이를 타고 사행하다가 남동의 수구를 향해 꺾여서 합쳐지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고, 그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쌓아 다지는 내탁 공법을 사용했다 

 

▲상당산성 공남문

 

▲상당산성 성벽

 

4벽 중에서 서벽이 가장 높고, 장대·포루가 배치된 점으로 보아 이 성의 방어 요지가 서쪽임을 알 수 있다. 성곽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한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 2개의 암문, 동장대와 서장대, 15개의 포루, 1개의 수구 등이 있었다. 1977~80년에 남··동문의 문루를 복원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성벽 위에 설치하였던 성가퀴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성벽의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지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서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시설로는 남문을 비롯하여 동문과 서문, 3개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 2개의 암문(暗門 :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 만든 성문), 2곳의 장대(將臺), 15개의 포루(砲樓)터 외에 성안 주둔병력의 식수를 대기 위한 대소 2곳의 연못이 있다. 정문인 남문 주변에는 3개의 치성과 장대, 4곳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상당이라는 명칭은 백제 때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에 청주목(淸州牧)이 상당현(上黨縣)이라 불렸고, 숙종 때 축성기록에 上黨基址 改石築(상당기지 개석축)’이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남문 밖에서 발견된 옛 기와의 명문을 통해 통일신라의 서원경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남치

 

▲상당산성 남치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는 청주읍성에 있었으며, 그 배후인 성당산성에는 병마우후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대략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어 산성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1716)부터 영조 23(1747)까지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이때 성벽 축조는 물론 성내에 구룡사 및 남악사와 장대사의 3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으며, 관아건물과 장대·포루·창고 등이 완성되어 면모를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보수되었다.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가 30만 명의 병력으로 쌓았다고도 하며, 따라서 김유신 장군의 전적지인 낭비성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상당산성이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1716)에서 45(1719)까지 충청병사 유성추의 감독으로 대대적으로 성벽에 대한 개축이 이루어졌고, 이듬해에는 성내에 구룡사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다는 것이 성문 무사석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 후 여러 번의 수축이 이루어져 성내의 여러 시설인 관아사, 군기고, 창고, 수구, 장대, 포루 등이 완성되었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인 진동문(鎭東門), 서문인 미호문(弭虎門), 남문인 공남문(控南門)3개 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는데,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정비공사로 동·남문루와 동문이 재건되었고 1992년 말에는 동장대 역할을 했던 동화정(棟和亭)도 재건되었다. 또한 1995년도의 발굴조사로 서장대 역할을 했던 제승당(制勝堂)의 규모(15)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만든 것이다.

 

▲상당산성 남치

 

▲상당산성 남암문

 

▲상당산성 남암문

 

▲상당산성 남암문

 

국내에서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청주의 상당산성은 조선 후기 이인좌의 난과 관련이 깊다.

 

영조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서로 상극 음식인 게장과 홍시를 먹여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1724년 음력 8월 병약하던 景宗이 승하했다. 갑자기 욍위를 물려받은 조선 21대 임금 英祖는 온갖 소문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肅宗과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었던 왕세자(후일 경종)와 달리 멸시 속에 성장한 영조의 재위는 순탄치 않게 출발한 것이다. 경종 즉위 2년 우여곡절 끝에 왕세자가 되고, 3년 뒤 노론세력의지지 속에 왕위를 물려받게 되지만, 당파싸움의 격랑은 멈출 줄 몰랐다. 영조의 경종 독살설까지 저잣거리에서 공공연히 떠돌아 다녔다. 게다가 어머니가 노비출신이니 아들도 노비라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이 구중궁궐 안가지 넘어 들어왔다.

 

영조 등극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노론세력과 달리 반대 입장을 보였던 소론세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하루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해야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있던 소론세력은 세간의 경종 독살설을 명분으로 급기야 반란을 일으켰다. 주동자는 괴산출신의 이인좌였다. 17283월 상여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성의 성문 앞까지 접근한 이인좌의 반란군은 성안 내통자인 양덕부가 성문을 열어주자 손쉽게 청주성을 접수했다. 이 과정이서 성안에 있던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군관 홍림을 처단했다. 청주성을 점령한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충청권 최대의 요새였던 인근 상당산성마저 접수해버린다. 백제때 축성된 이후 한 번도 외침에 의해 점령된 적이 없는 상당산성은 그렇게 내침에 의해 점령되는 오점을 남겼다.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을 점령한 이인좌는 황간 회인 목천 진천 등지를 점령하고, 수령을 파견, 장정을 선발하는 등 세력을 키워나갔다. 또 왕족인 密豊君 坦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까지 하면서 안성까지 진격, 영조가 있는 한양을 목전에 두게 된다. 하지만 이인좌의 반란은 호남과 영남에서의 동시봉기가 실패하는 등 한계를 보이면서 엿새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북상하던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대패하고, 본거지인 청주성과 상당산성도 다시 관군에게 내주고 만다. 죽산으로 피신했던 이인좌는 마을사람에게 생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한 뒤 능지처참되면서 반란은 역설적으로 집권기반이 약했던 영조가 탕평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명분이 됐으며, 정국을 안정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상당산성 남암문에서 남쪽방향으로 직선거리 1.5km 지점의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것대봉수가 있다. 것대봉수는 조선시대 다양한 사료에 기록돼있을 만큼 변방의 긴급한 소식을 알리는 중요한 통신요충지였다. 신즌동국여지승람 청주목편에 것대봉수는 청주 동쪽 11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居次大봉수라 언급돼있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것대봉수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인좌의 무리가 군사를 일으킬 무렵 것대봉수의 봉수지기는 목씨 성의 노인이었는데, 목 노인은 선이라는 외동딸을 데리고 봉화대를 돌보고 있었다. 선이는 자라면서 동네 청년인 백룡 총각과 전혼한 사이였으나 홀로 남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리저리 날을 미루며 지냈다. 반면 백룡 총각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마음에 수시로 봉화대를 들락거리며 목 노인의 일을 거들어주고 있던 터였다.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이인좌의 무리는 군사를 일으킨 뒤 봉화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병사들을 것대봉수로 보냈다. 반란군은 고다로 봉수지기인 목 노인의 집을 습격하여 목 노인을 죽였다. 한편 청주 장에 나간 백룡 총각을 기다리기 위해 고갯마루에 나가 있던 선이는 병사들이 집으로 가는 것을 수상히 여겨 지켜보다가 목 노인을 해치는 것을 목격했다. 놀란 서이는 곧바로 봉수대로 달려가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려했다. 그러나 반군의 병사들은 다시 봉수대로 쫓아 올라가 선이마저 죽였다. 이때 장에서 돌아오다 봉수대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달려온 백룡 총각은 선이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는 격투 끝에 반란군을 해치우고 봉수대에 불을 지펴 청주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상당산성은 임진왜란이 낳은 비운의 장수 원균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원균운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자 이에 불복, 좌천되어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된다. 충청병마절도사 원균은 상당산성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부역을 과하게 시켜 조정대신들으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훗날 포악한 성품으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단초가 여기서 비롯됐다. 1597년 정유재란을 앞군 시점, 수군 수장을 두고 조정에서 이순신과 원균울 저울질하는 과정에 이 내용이 드러난다.

 

尹泂은 아뢰기를, “병사 원균은 상당산성에서 성을 쌓을 때에 편의에 따라서 하지 않고서 잔폐한 고을이건 부성한 고을이건 가리지 않고 각각 200~300명을 내게 하여 부역을 독촉하므로 근착이 없는 자는 죄다 유이하고 겨우 남아 있는 자도 장차 보전하기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성이 원망하고 배반한다면 성을 아무리 굳게 쌓았더라도 누구와 함께 지키겠습니까. 더구나 이 농사철에 분주히 명을 따르기에 지쳐 백성이 밭에 나가 농사짓지 못하므로 이 때문에 원망이 더욱 극도에 이르렀으니, 우선 농한기를 기다려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빨리 비변사를 시켜 될 수 있는 대로 잘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대개 원균이 하는 짓이 외람되므로 신이 논계하려 하였으나, 원중이 일을 맡은 사람을 가벼이 논하여서는 안 된다 하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하지만, 실공에는 원균이 상당산성을 보수할 당시,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른 시각에서 그의 모습을 조명한 기록도 있어 주목된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원균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상당산성을 쌓을 때, 원균은 토실을 만들어 몸소 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 합니다. 대개 나라를 위하는 데는 성심이 있습니다. 상당산성을 쌓을 때 움막을 만들고 자면서 감독해 수축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상당산성에서의 과다 부역 논란과 관현 원균의 손을 들어줬다. 대신들의 찬반논란을 무릅쓰고 선조는 수군의 선봉으로 삼고자 한다며 수군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다.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미호문

 

▲상당산성 미호문

 

▲상당산성 미호문

 

▲상당산성 미호문

 

▲상당산성 미호문

 

▲상당산성 미호문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수구

 

▲상당산성 수구

 

▲상당산성 수구

 

▲상당산성 동암문

 

▲상당산성 동암문

 

▲상당산성 동암문

 

▲상당산성 동암문

 

고대전쟁에서 산성의 견고함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때문에 축성에 기울이는 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성벽축조시 구간별로 인근 지역주민들에게 나눠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성돌에 담당지역 주민과 공사 책임자를 새김으로써 훗날 부실공사가 드러날 경우의 책임소재까지 분명히 했다. 오늘날의 공사실명제인 셈이다. 상당산성은 이러한 성곽축조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9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의 상당산성 일대 조사과정에서 성벽에 새겨진 사람이름, 숫자, 관직명 등이 발견됐다.

 

*숫자 ’, ‘

*牌將閑良, 都監 등 관직명과 신분표기명

*忠州, 鎭川 등의 지명

*趙洸錫, 梁德溥 등 여러 명의 이름

 

이 글자들은 조선 후기 상당산성의 개보수 과정에서 새겨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우선 숫자 ’, ‘는 공사구간을 표시한 것이다. 지금도 대규모 공사를 할 경우 1구간, 2구간 등으로 구분해 진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牌將은 지금의 현장 감독처럼 인부들을 통솔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는 말단지휘자이며, 閑良은 서자출신의 지역 양반을 뜻하는 것으로 신분과 담당업무를 표시한 셈이다. 청주성의 외곽산성인 상당산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 진천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은 개보수 작업에 청주 뿐 아니라 충주, 진천 등의 주민과 석공까지 동원됐음을 보여준다.

 

趙洸錫이라는 인물은 서로 다른 성벽에서 이름이 발견되는데, 각각 이름 앞에 붙은 신분이 패장과 도감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조광석이 비정규직인 현장 감독으로 근무하다 정규직인 도감으로 슨진한 것을 의미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밖에 성돌에 새겨진 인물인 梁德溥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청주읍성의 성문을 열어준 인물로, 사료에도 언급되고 있다. 영조실록에 보면 병사 이봉상이 관기인 월례와 함께 있는데 믿는 신하 비장 양덕부가 문을 열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당산성을 쌓는데 공을 세웠으면서도 뒷날 반란군에게 성문을 열어주는 행동을 한 것이다. 성돌에 새겨진 양덕부의 이름은 누군가에 의해 반쯤 지워져 있는데 아마 그러한 그의 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상당산성 동암문 각자

 

▲상당산성 동암문 각자

 

▲상당산성 동암문 각자

 

공남문은 상당산성의 정문이자 남문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성문이 뚫려도 쉽게 들어서지 못하도록 성문 뒤쪽에 옹벽이 있다. 옹성이 성문 바깥에 있지 않고 안쪽에 옹벽이 있는 것도 특이하다. 성문을 드나들 때 반드시 꺾여 드나들도록 해 놓았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특이하게도 도깨비문양이 그려져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문루 천장에는 불을 다스리는 남쪽의 수호신인 주작이 그려져 있다. 남문의 문 옆벽애는 1802년에서 1836년까지 성을 개보수한 기록도 남아있다.

 

상당산성의 축성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설, 김유신 장군의 둘째 아들 元貞公이 쌓은 西原述城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청주는 신문왕 5(685)에 원소경이 되었고 경덕왕 16(757) 서원경으로 승격됐다. 이에 병행해 상당산성의 비중도 더욱 높아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남문 밖에서 沙梁部라는 신라 6부의 이름이 적힌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통일신라 때 이곳에 관리와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진동문

 

▲상당산성 진동문

 

치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성벽에 작은 문이 뚫려있다. 비밀통로 역할을 했던 남암문이다. 적의 눈에 띄지 않게 드나들다가 발각될 경우 곧바로 차단하기 위해 암문 옆에는 흙을 쌓아 두기도 했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면 동암문이 나타난다. 발아래를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외부에서 쉽게 눈에 띄지 않은 동암문은 성안 방향으로는 타원형으로 이어지게 설계돼 더욱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암문이라는 명칭에 지극히 충실한 셈이다. 찬찬히 암문을 살펴보면 안쪽 성벽에 새겨진 예사롭지 않은 한자들이 눈에 띈다. ‘梁德溥 牌將 閑良이라는 명문이다. 양덕부는 이인좌의 난 때 청주읍성의 성문을 열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성벽이 무너질 경우 책임을 묻기 위해 공사 당시 책임자의 이름을 성벽에 새긴 것이다. 동암문은 1720, 숙종 46년에 축조된 것으로 상당산성 1차 개축(1716~1719)이 이루어진 후의 일로 이처럼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암문 내벽에 康熙更子五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상당산성 진동문

 

▲상당산성 진동문

 

▲상당산성 진동문

 

▲상당산성 진동문

 

▲상당산성 진동문

 

▲상당산성 진동문

 

진동문은 상당산성의 동문이다. 단단하고 조밀한 구조물과 밖으로는 견고하면서도 안쪽으로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단아한 모양새가 마치 정결한 사대부집 부인을 보는 듯하다. 동문을 지나 평탄하게 이어진 성벽에 기와지붕을 한 대형 건물이 성벽 위에 우둑 서있다. 장수의 지휘소인 東將臺이다. 상당산성에는 동장대와 서장 등 2곳의 장대가 있는데 1992년 동장대가 복원됐다. 동장대 아래 성 안쪽에는 산성에 위치한 것으로는 규모가 상당히 큰 연못이 온갖 수초와 연꽃으로 치장한 채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산성에서 식수원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이 연못이 상당산성의 규모와 중요성을 높이는 기본바탕이 됐을 것이다.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보화정

 

▲상당산성 보화정

 

▲상당산성 보화정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주변풍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연지

 

▲상당산성 연지

 

▲상당산성 연지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상당산성 성벽

 

 

 

<2015.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