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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성부산

蔥叟 2014. 4. 4. 00:32

경주 성부산

 

   성부산星浮山은 경주 남쪽에 있는 높이 315m의 산으로 그 모양이 삼각형같이 뾰족하며 솥뚜껑 같이 생겼다 해서 소두방산이라고도 부른다. 또는 솟대같이 나무를 세워놓고 기도하는 산이다. 이 산은 서쪽과 북쪽은 산줄기가 없고 동쪽과 남쪽은 산줄기가 이어지는데 산봉우리에는 묘가 1기 있으며 그 남쪽에 옛날 기우제를 지내던 무제단산이 있고 서쪽에 기우제를 지내면 물을 내려준다는 수리줄 골짜기가 있다. 이 산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먼저  삼국유사의 성부산에서 별이 뜬 이야기를 소개한다.

 

▲성부산

 

▲성부산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신라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군사를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니 고구려·말갈(靺鞨)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하여 서로 싸웠으나 끝이 나지 않아 5월 11일에 시작해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는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했으나 장차 어찌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신이 달려와서 아뢴다.  "일이 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하고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모드고 신술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나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한산성 안에 있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서로 보고 울 뿐이었는데 이때 적병이 이를 급히 치고자 하자 갑자기 광채가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적의 포석(砲石) 30여 곳을 쳐부쉈다.  이리하여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모두 땅에 자빠졌다가 한참 만에야 깨어나서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우리 군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일로 해서 성부산이라고 하나 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설說도 있다. 산山은 도림都林 남쪽에 있는데 솟은 한 봉우리가 이것이다.  서울에서 한 사람이 벼슬을 구하려고 그 아들을 시켜 큰 횃불을 바라보고 모두 말하기를, 그곳에 괴상한 별이 나타났다고 했다.  王이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게 했더니 그 아버지가 거기에 응모應募하려 했다.  그러나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별로 괴상한 일이 아니옵고 다만 한 집에 아들이 죽고 아비가 울 징조입니다" 했다.  그래서 드디어 기도를 그만두었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

 

   또 하나의 이야기는 문무왕 때의 이야기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날 왕은 그의 서제(庶弟) 차득공(車得公)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재상이 되어 백관(百官)들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四海)를 태평하게 하라"하니 차득공은 말한다.  "폐하께서 만일 소신(小臣)을 재상으로 삼으시려 하신다면 신은 원컨대 남몰래 국내를 돌아다니면서 민간부역(民間賦役)의 괴롭고 편안한 것과, 조세(租稅)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관리(官吏)의 청렴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을 알아 보고 난 뒤에 그 직책을 맡을까 합니다."  왕은 그 말을 좇았다.  공(公)은 승의(僧衣)를 입고 비파(琵琶)를 들어 마치 거사(居士)의 모습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우수주(牛首州; 지금의 춘주春州)·북원경(北原京; 지금의 충주忠州)을 거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해양海陽)에 이르러 두루 촌락(村落)을 돌아다니노라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安吉)이 그를 이인(異人)인 줄 알고 자기 집으로 청해다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했다.  밤이 되자 안길은 처첩(妻妾) 세 사람을 불러 말했다.  "오늘밤에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 자는 자는 내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 것이오."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오"했다.  그 중에 아내 한 사람이 말한다.  "그대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겠다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성부산

 

▲성부산

 

 

 

 

   이튿날 일찍 떠나면서 거사는 말했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서 내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중간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 속언俗言에 단오端午를 차의車衣라고 함)요.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거든 내 집을 찾아 주면 고맙겠소."  그 뒤에 차득공(車得公)은 서울로 돌아와서 재상이 되었다.  나라 법에 해마다 각 고을의 향리(鄕吏) 한 사람을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서 지키게 했으니 이것이 곧 지금이 기인(其人)이다.  이때 안길이 차례가 되어 서울로 왔다.  두 절 사이로 다니면서 단오거사(端午居士)의 집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은 길 가에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한 늙은이가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한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내(大內)이고 단오란 바로 차득공(車得公)이오.  그가 외군(外郡)에 비밀히 돌았을 때 아마 그대는 어떠한 사연과 약속이 있었던 듯하오." 

 

   안길이 그 사실을 말하자, 노인은 말한다.  "그대는 궁성(宮城)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하는 궁녀(宮女)를 기다렸다가 말해 보오."  안길은 그 말을 좇아서 무진주의 안길이 뵈러 문밖에 왔다고 했다.  차득공이 이 말을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아 궁중으로 들어가더니 공(公)의 비(妃)를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星浮山; 혹은 성손평산星損平山) 밑에 있는 땅을 무진주 상수(上守)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伐採)를 금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안팎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산 밑에 밭 30무(畝)가 있는데 씨 3석(石)을 뿌리는 밭이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가 모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도 또한 흉년이 들었다 한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

 

   우리가 지금은 지나쳐 버리기 쉬운 산이지만 알고 보면 성스러운 산일 뿐 아니라, 전설의 산이며, 우리가 어렸을 때 기도하던 산이리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산을 우러러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지방에서 잊혀져 가는 옛 전설을 찾고 내 고장의 얼과 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옛 선인들의 거룩한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도 전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것으로 알고, 내 고장의 아름다운 전설을 많이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전설 속에 우리의 삶이 있고 전설 속에 깊은 애환이 있고 사랑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성부산

 

 

 

<2014.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