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화계 유의건 묘
내남면 박달리 윗고사리 고거산정(쌍학골)에 화계 유의건(花溪柳宜健)의 묘가 있다. 진사이면서 참봉인 화계선생은 1686년 정월에 내남면 망성리(윗새마을)에서 태어나 영조 36년(1760) 7월 19일 74세로 생애를 마쳤다. 본관은 瑞山이며, 아버지는 起瑞이고 어머니는 학성 이씨 延義의 딸이었다. 자식은 처음 부인에게 2남, 재혼 부인에게는 1남3녀를 두었다. 화계의 자는 순겸(順兼)이며 5세 때부터 서책을 읽을 줄 알았으며 점점 자라서는 총명하여 널리 공부하였는데 눈여겨 본 것은 모두 기억하였다. 성품이 독실하여 부모를 모시며 어른들을 받드는데 있어 모두 한결같이 예절이 있었다. 옛날 吉日에 집의 뜰에서 술을 조금 마신 후 이를 즐겼는데 부모로 부터 훈계가 있자 이를 끊었다. 또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가다듬어 과거를 위하여 서책을 읽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조 11년(1735, 49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경전과 史書 읽기를 즐기고, 易學에 대한 학문의 깊이가 더욱 심오해졌고, 제자百家를 통함에 曆法은 손가락으로 헤아려 취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특히 두보와 한유의 시문을 좋아하며, 마음이 불편하면 이를 읊조렸으며, 화계집 여덟권을 남겼다. 자신의 죽음을 사전에 알라 문인과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공이 떠난지 5년 뒤(1765) 영조 41년 겨울에 관에서 천거하여 만년전참봉전(萬寧殿參奉)을 제수하였으며, 이는 조정에서 영남의 명성을 듣고 그의 생애를 빛나게 함이었다. 즉 영남의 최고석학임을 나라에서 인정했던 것이다. 특히 화계집에 실려있는 羅陵眞贋設은 신라왕릉의 진위 여부를 최초로 의문을 제기한 문헌으로 유명하다.
▲화계묘
▲화계묘
▲화계묘비
▲화계묘비
▲화계묘비문
▲화계묘비두
▲화계묘비두 연화문
<2014. 3. 16>
'◈한국문화순례◈ > 서라벌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광석리 지석묘 (0) | 2014.04.08 |
---|---|
경주 안심리 암각화 (0) | 2014.04.07 |
경주 최효자정려비 (0) | 2014.04.05 |
경주 성부산 (0) | 2014.04.04 |
신라 호국사찰 - 경주 사천왕사 종루터 (0) | 2014.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