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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효자정려비

蔥叟 2014. 4. 5. 00:26

경주 최효자정려비

 

   내남면 상신리 마을입구 길가 오른쪽 언덕 아래에 낡은 비각 속에 비가 하나 보이는데 이 비가 바로 최치백의 효자비가 있는 정려각이다. 정려각은 예부터 충신, 효자, 열녀에게 나라에서 정려 또는 정문을 내리고 비를 세워 널리 표창하였다. 이는 후세에까지 내려오면서 그들의 후손의 명예는 물론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오래 귀감이 되고 있다. 더욱이 정려비문의 글씨가 이름난 서예가의 좋은 글씨와 석비의 조형성이 뛰어나면 금상첨화이다. 이는 곧 예술성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최치백 정려비에는 전면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孝子 贈朝奉大夫司憲府持平崔公致栢旌閭碑

 

 

▲최효자정려비

 

여기서 조봉대부朝奉大夫는 조선시대 종사품從四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종사품從四品의 하계下階로서 조산대부朝散大夫보다 아랫자리이다. 持平은 조선 시대 사헌부() 정오품() 관직으로 1401(태종 1) 관제 개혁 잡단() 고친 것으로, 이후경국대전()》 의해 법제화되었다. 그러니까 효자 최치백에게 조봉대부인 사헌부 지평에 추증하고 정려비를 세운다는 내용이다. 또 비문의 본문 말미에는 '完山人 李匡師 書'라는 필자와 함께 '崇禎甲申後在壬申'이라는 연도가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 비문의 글씨를 쓴 사람이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룰만한 서예가 嶠 李匡師라는 사실이다. 이광사는 1705년(숙종 31) 전북 완산에서 태어나서 1777년 73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오직 서예가로서 조선 후기 서예 발달에 커다란 획을 그은 분이다. 원교는 중국의 漢碑를 얻어 보고 篆隸와 眞草의 필법이 이러한 法帖과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書訣을 지어 서예학습의 원리를 크게 깨우치게 하였다. 조선후기 서예가로는 한호를 거쳐 윤순과 이광사로 이어지는데 윤순은 이광사의 스승으로서 따로 시대를 구분 할 수가 없다.

 

 

▲최효자정려비

 

원교의 書藝術은 法帖의 근간 위에서 그 法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획의 굴곡은 물론 結構, 章法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법도를 어기는 작품이 많았다. 이는 智果의 書評과 張旭의 草書에서 온 것이요, 가까이는 明 王鐸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으나 오랜 동안 落島의 유배생활에서 자신의 심경의 표현일 수도 있다. 또한 원교는 王體小楷 법첩을 근간으로 大小, 斜正, 疎密 등의 변화를 극대화하여 魏晉의 楷書와 다른 독특한 楷書風을 이루었고, 行草에서는 왕희지체를 비롯한 古法에 근거하면서 활달함과 險勁을 가미한 개성적 筆意로서 18세기 조선 서풍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漢隸書 중에서 古隸를 模本으로 하여 晉代의 楷書와 조합하여 隸書劃에 楷書風의 字形을 이루어 隸書之間의 서풍을 만들어내는 독특함도 보였다. 따라서 원교는 서법의 새로운 시도와 章法으로 당시 주자학의 기본윤리에 대한 새로운 변혁의 기운을 불어 넣었으며 문자향 서권기의 서법론을 정립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원교 이광사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인 1786년에 태어났다. 추사는 원교의 글씨에 대하여 상당한 부분에서 비판을 하는데, 추사의 書員嶠筆訣後에서는 원교의 書訣을 혹평하는 것은 두 사람의 서풍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 서예의 근본은 오만과 사치가 아닌 겸손과 진실로 덕이 충만한 學書자세를 말해주는 '書如其人'이란 말이 있다. '글씨는 곧 그 사람 자신이다'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것을 잘 말해주는 추사와 원교의 일화가 남아있다.

 

 

▲완산인이광사서

 

추사는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긴 유배생활을 떠나게 된다. 평소 남달리 교유하던 초의선사를 보기 위해 해남의 대흥사에 들리게 된다. 대흥사의 금당 위에 '大雄寶殿'이란 顯額을 보고 초의에게 말한다. '저 현액을 당장 내리고, 내가 써 주는 글씨를 걸어라'했다. 추사의 隸書의 글씨로 '無量壽殿'이라고 써 준다. 원교 글씨는 내려지고 추사 글씨가 걸리게 된다. 오랜 후 추사는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을 가면서 다시 대흥사에 들러서는 초의에게 자신의 오만햇음을 고백한다.  '내 글씨를 내리고 다시 원교 글씨를 걸어두게' 한다. 지금도 대흥사의 금당 위에는 원교의 '大雄寶殿'의 현액이 걸려 있다.

 

조선 영조 때는 문예부흥기라 할 만큼 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이다. 이때는 권선징악을 근본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충과 효의 이념을 강조하였다. 조정에서는 충, 효, 예에 대한 것을 장려하고자 정려비를 많이 세웠다. 이 시기에 원교는 마침 관직에 있었다. 따라서 전국의 충신, 효자, 열녀를 위해 훌륭한 글씨를 많이 써 주었을 것이다. 효자 최치백의 정려비문의 글씨도 이렇게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비문 전면의 큰 글씨는 隸書之間의 書風으로 가로획은 예서의 필법으로 보이면서 파임의 처리는 楷書 필획으로 결구를 형성하고 있다. 비문 본문의 글시는 왕희지의 楷書風에 당의 歐陽詢의 해서와 예서의 筆意를 살짝 가미한 필법으로 정교하면서 간결한 서체로 표현하고 있다. 이 비문을 쓸 때 그의 나이가 45세 무렵인데, 원교의 예술적 작품성보다는 비문의 내용처럼 안정감 있게 정제된 선비글씨 다운 품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숭정갑신후재임신

 

 

▲비문

 

 

 

<2014.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