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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호국사찰 - 경주 사천왕사 금당터

蔥叟 2014. 2. 25. 01:06

신라 호국사찰 - 경주 사천왕사 금당터

  

   사천왕사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이었다. 일명 회탑식(回塔式)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사찰의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3개의 금당이 탑을 둘러싸는 형식의 가람배치였다. 반면 백제는 사찰의 입구에 못을 두고 못을 건너면 탑이 나타나고 탑의 뒤에는 금당이 있고 금당의 뒤편에 강당이 모두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늘어선 이른바 일탑일금당 방식의 가람을 경영하였다.

 

   이에 비하여 신라의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와 통일 후를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북방불교인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일탑삼금당의 가람배치가 유행했다. 그러나 고구려와는 달리 회탑식 가람배치는 찾아볼 수 없고 분황사와 같은 품자형(品字形)의 가람배치를 하거나 황룡사와 같이 3개의 금당을 동서 일직선상에 병렬시키는 가람배치를 하였다. 그러나 통일 후에는 백제의 가람배치 양식이 들어와 금당과 강당을 짓게 되는데 금당 뜰에 들어서는 탑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단탑에서 동서로 두 개의 탑을 세우는 쌍탑형식의 가람배치인 이른바 쌍탑일금당의 형식이 등장한다.

 

   쌍탑일금당 가람의 첫 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이며 제2호가 망덕사이며, 제3호는 감은사였다. 다만 사천왕사와 망덕사는 목탑을 조영하였으나 감은사에서는 석탑이 등장하는 것이다. 감은사탑 이후에 신라에서는 주로 석탑을 많이 만들었지만 목탑의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가 9세기의 절이었던 보문사에 목탑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삼국시대 이래로 건립되던 목탑 문화의 전통은 통일 후에도 오랫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5차 조사 결과, 금당이 나중에 확장된 사실을 확인됐다. 선대 금당은 돌을 깔고 흙을 다져 기단부를 조성한 반면 후대에 확장된 금당의 기반부는 선대 금당지의 기단 끝부분을 비스듬히 자르고 뒷부분에 흙과 돌을 일부 섞어 구축한 것으로 확인됐다. 후대 금당은 동서 21m, 남북 15m 규모로 선대 금당과 비교하면 동서 방향은 200㎝, 남북은 300㎝ 확장됐으며, 남북축의 중심이 북쪽으로 약간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2013.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