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 가는 길 - 경주 창림사터 쌍귀부
모가 죽은 사각대석 위에 두 마리의 거북이가 큰 비석을 등에 얹고 고개를 치켜들고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거북이의 크기는 한 마리의 너비가 86.3cm, 길이 142.5cm, 높이 38.5cm이다. 지금 두 마리 모두 머리가 덜어지고 없는데, 그 중 한 마리의 머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 한 마리의 머리는 행방을 모르고 있다. 무열왕릉 비석의 귀부가 목을 길게 뽑아들고 먼 앞을 내다보면서 코와 입으로 연기를 뿜으면서 힘차게 나가는 모습에 비해 창림사 거북이들은 힘찬 생기가 없다. 귀부의 얼굴은 뒤로 젖히고 표정은 용의 얼굴처럼 무거워졌고 입에는 구슬을 물고 있다. 거북이의 목 앞에 뱀처럼 복린(腹鱗)이 새겨져 있는 것도 거북이가 용처럼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다. 거북이의 복린이 정면에서 조금 바깥쪽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은 거북들의 머리가 정면을 보지않고 조금씩 바깥쪽으로 돌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쌍귀부
바깥쪽 발은 서로 땅을 딛고 있으나, 안쪽 발은 옆으로 밀치면서 헤엄치듯이 걸어오고 있다. 뒷발은 귀갑 속에서 조금 아와 있고, 고리는 모두 오른족으로 돌리고 있다. 무열왕릉 비석에서 처럼 강한 힘은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피가 도는 듯한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된다. 귀갑문도 무열왕릉 비석처럼 일정한 6각으로 철갑을 본든 것이 아니고 여러형태의 귀갑문이 모나지 않게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귀갑문 가운데가 조금식 부풀어 있어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은 돌로 만든 거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신라의 아름다움은 강함과 부드러움이 합친 것인데, 귀부에는 강함이 사라지고 부드러움만 남아있다.
▲쌍귀부
잔등 위에는 비석받침이 있다. 비신 뿌리가 박혔던 자리는 너비 87.7cm, 두께가 19.3cm이다. 이것은 비신의 뿌리가 박혀있던 자리이기 때문에 비신은 이보다 좀더 컸을 것이다. 비신에는 신라의 대서예가 김생(金生)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김생은 성덕왕 신해년(711)에 태어나서 80세가 넘도록 붓을 놓지 않앗다는데 예서, 행서, 초서 등에 다 뛰어난 명필이엇다고 전해진다. 김생이 80세 되던 해는 원성왕 7년(791)인데 비석도 8세기 말엽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외동읍 말방리에 있으며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비의 귀부, 소성왕을 위해서 세웠다는 무장사 아미타조상비의 귀부, 포항 신광면 비학산의 법광비 귀부 등은 모두 쌍두귀부로 되어 잇다. 이 시기에는 쌍두귀부가 유행하던 시대로 그 중 창림사 쌍두귀부는 흰색의 화강암으로 뙤었기 때문에 더욱 따뜻함을 주고 있다.
▲쌍귀부
<201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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