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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 가는 길 - 경주 창림사터 삼층석탑

蔥叟 2012. 11. 25. 05:18

삼릉 가는 길 - 경주 창림사터 삼층석탑

 

   남산 장창골 기슭에 우뚝 선 탑이 있으니 창림사이다. 창림사(昌林寺)는 혁거세가 13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곳이라고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기록이다. 물론 그 흔적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사람(혁거세와 알영)을 받들어 길렀다.

 

<삼국유사 신라시조혁거세왕조> 

 

▲삼층석탑

 

▲삼층석탑

 

   창림사라는 사명(寺名)은 불법의 세계가 흥하라는 의미를 가졌는데 그 기원은 인도의 초기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와 기원정사(祇園精舍)가 뜻하는 동산, 오늘날의 총림(叢林)이 가리키는 숲을 의미하는 것인데 숲(林)은 스님들이 수도하면서 기거하는 공간의 뜻을 가지고 있다. 절터는 현재 서쪽에서부터 4단의 계단식으로 가람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나원리절터나 황복사터와 같은 8세기 전반기에 유행한 가람배치방법이다. 따라서 창림사는 8세기 전반기에 창건되어 계속 중창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기록상으로는 서기 860년 문성왕 때 창건된 것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남아있는 석탑의 양식으로 볼 때 8세기 전반에 지어진 절임을 알 수가 있다. 추사 김정희는 1817년과 1824년 두 번에 걸쳐 창림사를 방문하였다 1824년 추사가 두 번째로 경주를 방문하였을 때 경주부의 안내로 창림사를 답사하였는데 석공이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 출토된 사리함의 명문을 그대로 옮겨 적어놓았다. 총독부가 발간한 「경주남산의 불적」에는 추사의 필사한 내용을 사진으로 실어놓아 명문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지만 실물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석탑이 무구정광다라니경에 의해 세웠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때 절을 세운 것으로 해석하였다.

 

▲삼층석탑

 

▲삼층석탑

 

   그러나 사진의 탑지(塔誌)는 네모이지만 현재의 탑의 사리공은 원형이기 때문에 방형의 탑지가 들어갈 수가 없는 형편이므로 네모난 사리공이 잇는 또 다른 탑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창림사터 출토 팔부신중상도 현재 창림사터 삼층석탑의 팔부신중상과는 크기가 다르다. 박물관의 팔부신중상은 9세기 중엽의 조각양식이지만 석탑의 팔부신중상은 8세기 전반기의 작품이다. 창림사터의 건물지를 살펴보면 초석과 초속 사이에 장대석이 없는데 이는 불국사보다 창건 연대가 올라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페사지를 찾다보면 절터에 무덤이 매우 많음을 볼 수 있는데 창림사터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은 대원군이 예산의 가야사를 폐사시키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면서 절터는 모두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각지의 절들이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 폐사되고 불상의 목이 떨어지고 석탑이 무너지는 비운을 겪었다. 1974년에 복원된 이 탑은 창건당시에 세워진 탑인데 8세기의 웅혼한 힘을 느낄 수 있다. 탑의 연대를 구분하는 방법으로는 층급받침의 수, 기단부 탱주의 수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기단부의 가로 세로의 비율을 통해서도 추정이 가능하다. 초기의 탑은 3.5∼4:1정도로 넓었지만 시대가 내려오면서 1.5∼2:1까지 줄어들게 된다.

 

▲삼층석탑

 

▲삼층석탑

 

   2층기단에는 팔부신중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경주지역 최초의 팔부신중상이다. 이후 경주의 모든 팔부신중상이 창림사탑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이곳의 팔부신중상은 사자탈을 쓰고 있는데 경주이외의 팔부신중상에는 공후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청도 운문사, 군위 지보사(持寶寺), 그리고 멀리 서산의 보원사터의 건달바이다. 창림사터의 팔부신중상 가운데 아수라상은 특히 조각이 아름다운데 삼두팔비(三頭八臂)의 형상을 하고 귀신들의 세계를 다스린다고 한다. 1층탑신부의 동서남북에 새겨진 쌍바라지문은 고선사탑을 모방한 것인데 이탑이 고선사탑 바로 다음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9세기가 되면 남쪽에만 쌍바라지문을 새긴다.

 

   이탑은 고려시대에 해체 복원되었는데 개경에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가 오지 않아 경주의 고선사탑과 창림사탑을 해체하여 사리를 꺼내 개성으로 가져가 내불당(內佛堂)에 모시고 기도를 드리니 4일 뒤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藏舍利條)에 의하면 문성왕 때인 당나라 대중 5년 신미(851)에 당나라에 들어갔던 원홍(元弘)이 부처의 이를 가져왔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넣고 탑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을 추사가 왔을 때 해체한 것이다.

 

▲삼층석탑

 

▲팔부신중상

 

唐大中五年辛未, 入朝使元弘所將佛牙[今未詳所在, 新羅文聖王代.], ...중략...今在北崇山神光寺.

 

당나라 대중 5년 신미(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지금은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 때 일이다.- ...중략...지금 북승산 신광사에 있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

 

12년(1021) 5월에 경주 고선사의 금라가사와 불정골, 창림사의 불아를 내전에 안치했다. 

 

<고려사 권4 현종전>

 

창림사(昌林寺) : 금오산 기슭에 신라 때 궁전의 옛터가 있었는데, 후인들이 그 자리에 이 절을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 옛 비석이 있으나 글자는 없다. 원 나라 학사 조자앙(趙子仰)의 창림사비(昌林寺碑)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이것은 당나라 시대 신라 중 김생(金生)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昌林寺碑)로 자획(字畫)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의 이름난 조각가라도 그보다 훨씬 나을 수는 없다. 옛말에, '어디인들 재주 있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으랴?’ 하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1>

 

▲팔부신중상

 

▲팔부신중상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까지는 법등이 이어졌으나 조선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1824년에 추사가 창림사에 와서 당시에 해체 복원하던 탑의 모습을 기록해 두었다. 이 탑 사리공에 장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국왕경응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無垢淨塔原記)」를 새긴 동판을 넣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706년 황복사에서 최초로 만들었다. 무구정탑원기는 무구정광대다리니경에 의존해서 만들었는데 99개의 소탑을 만들어 넣으면 만개의 탑을 만드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황룡사에도 경문왕 때 보수하면서 소탑을 넣었던 적이 있다.

 

   창림사의 가람배치는 산지가람인데 산 쪽에 탑을 세우고 아래쪽에 건물을 세웠는데 층단식 건물이었던 것 같다. 또 창림사터에서는 비로자나불이 출토되었는데 비로자나불은 선종에서 많이 조성하던 불상으로 왕실에서 세운 절에는 모두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도의선사가 최초로 선종을 이 땅에 도입하여 황룡사에서 강의를 하자 교종 승려들은 악마의 말이라고 배척했다. 그러나 그후 왕실에서는 끊임없이 선종을 지원한다.

 

▲아수라상

 

 

 

<2012.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