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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 가는 길 - 경주 나정

蔥叟 2012. 11. 23. 05:37

삼릉 가는 길 - 경주 나정

  

   남산 서북쪽 낮은 구릉지대에 울창한 송림 가운데에 사로국의 개창자인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전하는 나정이 있다. 현재는 발굴이 이루어져 옮겨졌지만 발굴하기 전가지는 조선후기인 1803년에 건립된 작은 비각이 있었고 그 뒷편에 우물을 덮은 것으로 알려졌던 넓은 판석이 놓여져 있었다. 판석 주위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4개의 돌이 규칙적으로 사방에 둘러져 있었다. 비각 안에는 1803년 2월에 직제학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찬하고 경주부윤 최헌중이 쓴 시조탄강유허비가 세워져 있었다.

 

▲나정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三}歲,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왕즉위조>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欲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是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檢之, 有一紫卵[一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俗{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

진한지절 원년(B.C.69년) 3월 초하루에 여섯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의논을 하였다.

 

 

"우리들은 아직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없소. 그러니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을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해야 하지 않겠소."

이리하여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에 있는 나정(蘿井) 곁에서 상한 기운이 땅에 닿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곁에 백마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살펴본즉 자줏빛 알 한 개가 있었다.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을 추니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여졌다. 그로 인하여 그 아이를 혁거세왕이라고 이름하였다.

<삼국유사 신라시조혁거세왕조>

▲나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나정은 양산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양산이 어디인지 현재 잘 알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알천이라고도 부르는 북천변의 높은 곳에서 바라보이는 곳이어야 한다. 또한 토함산에서도 바라보이는 곳이어야 한다. 알천변에서 육촌장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회의를 하던 공간이고 높은 곳에 올라가 남족을 바라보던 곳이 북천변의 독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양산은 독산에서도 토함산에서도 바라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육촌의 이름을 거론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알천양산촌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는 알천과 양산촌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의미는 대체로 알천을 끼고 있는 양산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오늘날 남천과 서천 그리고 북천으로 둘러싸인 경주시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문천 남족의 남산보다는 알천에 가깝게 위치하는 낭산이 더 양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이루어진 발굴결과 한변의 길이가 50m, 폭이 120cm인 사각형 담장 내부에 한변의 길이가 10m이고 내부면적이 300.27이르는 8각형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우물유구와 기와, 토기 철제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완전한 8각형을 사방에서 두른 정사각형 담장이 확인되었다. 더구나 이들 네 담장은 동서남북 네 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8각은 흔히 원(圓)과 동의어였다. 8각과 원은 언뜻 보아 이질적인 듯하지만, 8각을 선이 아닌 곡선으로 연결해 버리면 쉽게 원이 형성된다. 4방과 8각으로 대표되는 하늘과 땅에 대한 전통적 중국 천문우주관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났다"고 해서 흔히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표현되는 까닭은 바로 8각을 곧 원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나정

    8각으로 상징되는 하늘과 4방으로 상징되는 땅이 세트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 나정 유적을 신라인들은 적어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로 인식했음이 명백하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이니 나정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이 감응(感應)하는 성소(聖所)인 셈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천신을 제사하는 제단이 거의 예외없이 8각형 구조를 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주 가깝게는 중국의 제후국에서 벗어나 황제국임을 선포한 대한제국이 하늘에 제사하기 위해 건립한 원구단이 8각형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8각은 애초에는 불교적 전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도교신학에서 유래한 하늘 그 자체인 것이다.

 
   발굴결과 나정은 우물이 아니며 사로국 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나 현 8각형 건물지와 그를 에워싸고 있는 담장은 문무왕 19년(679)에 제작된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 명문와 등이 출토되고 있어 7세기 중엽에 완성된 것이며, 성격은 구가 제사관련시설로 판단되고 있다. 따라서 나정 내의 팔각형 건물지는 소지왕 또는 지증왕대에 시조 탄강지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지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에 견주어 신라 역대 왕들이 즉위 후에 친히 제사를 지낸 신궁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담장 옆에서 출토된 '생(生)'자가 새겨진 명문기와는 주목을 끈다.

 

   '生'자가 새겨진 기와는 제작시기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7세기 후반에 해당하고, 다른 글자 없이 '生'이라는 글자만 단독으로 확인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生'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바는 나정이라는 곳이 박혁거세 탄강(誕降) 전설과 관련되는 곳임을 주목하면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에서 '낳다, 나다'라는 뜻을 지닌 '生'자를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기와가 사용되는 장소를 해당 기와에다가 명문으로 표시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왕이 머무는 왕성(王城)임을 의미하는 '재성(在城)'명 기와가 월성(月城)에서 다량 출토된 바 있다. 또 황룡사(皇龍寺)를 필두로 영묘사(靈妙寺), 천주사(天柱寺), 사천왕사(四天王寺) 등 경주 일대에 밀집된 신라시대 사찰터에서는 이들 사찰 이름이 적힌 명문 기와들이 집중적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나정

    이로 미뤄볼 때 이번 나정 유적 출토 기와 '生'자 또한 같은 맥락, 즉, 이들 기와가 사용될 곳을 표시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나정(蘿井)에 대한 신라시대 명칭으로 蘿井과 함께 '나을'(奈乙)이 쓰였다. 박혁거세 탄강 신화를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즉위년(기원전 57) 조 기록에 의하면 혁거세는 '奈乙'(나을)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있다. '蘿井'은 우물 '井'(정)자에서 엿보이듯이 순한문인데 반해 '奈乙'은 순 신라식 이름에 대한 표기이다. 生은 흔히 그 우리말 새김이 '날'이며 지금도 '날 생', '나을 생'이라 한다. 나정 출토 기와 명문인 '生'이라는 글자가 그 기와가 쓰일(혹은 쓰인) 곳을 표시하는 부호라면, 生이 곧 '나을(奈乙)'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정은 현재까지 발굴성과를 보아 제단이라는 사실은 이제 의심할 나위가 없어졌다. 우선 각각 동서남북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길이 50m에 달하는 그 안쪽 약 1천100평에 8각형 건물지 외에 뚜렷한 주거시설이 없다. 이는 이곳이 일상적인 주거지용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나아가 네 담장지 중에서도 유독 남쪽 담장에만 회랑식 대규모 정문시설을 마련했다. 동쪽과 서쪽 및 북쪽 담장에는 문이 있었다고 할 만한 흔적이 없다. 이로 볼 때 나정 유적이 제단이자 성소임은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나정

    문제는 이 나정이 곧 신라시대 최고의 제사시설이라는 신궁(神宮)일까 하는 점이다. 신궁(神宮)이란 「삼국사기」에 의하면 소지왕(재위 479∼500년) 혹은 지증왕(재위 500-514)때 시조가 탄강(誕降)한 곳에 세웠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궁은 그다지 기록이 많지는 않으나 신라멸망 때까지 가장 중요한 국가적 제사시설이었음은 명백하다.

第二十二代<智證主{智證王}>, 於始祖誕降之地<奈乙>, 創立神宮, 以享之.

 

제 22대 지증왕 때에 이르러 시조의 탄생지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

 

○十七年, 春正月, 王親祀神宮.

17년 봄 정월,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17년조>

 

    이런 점에서 신궁이 건립된 장소를 「삼국사기」에서 시조, 즉 박혁거세가 탄강한 장소라고 명확히 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지에 따르면 박혁거세 역시 여타 건국시조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다. 생물학적 아버지 대신에 신라인들이 내세운 혁거세의 아버지가 바로 하늘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박혁거세는 하늘의 하늘, 바로 천자(天子)라는 신화가 만들어진다.

 

▲나정

 

   한데 박혁거세 탄생 신화에서 또 하나 독특한 대목은 어머니도 누구인지 그다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박혁거세가 천자로 설정되었다고 해도 어머니는 분명히 있었을 터인데 적어도 문헌에서는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삼국유사」에 선도성모(仙桃聖母)라 해서 중국에서 건너온 이 여신이 바로 신라 시조의 어머니라는 신화가 수록돼 있음이 주목을 끈다. 선도성모가 신이 되어 살았다는 선도산은 후대에 내려오면 김유신의 두 여동생 중 맏이인 보희가 그 산꼭대기에서 방뇨를 하니 신라 서울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는 꿈 이야기에 등장하는 서형산,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실로 우연의 소산인지, 현재의 나정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선도산 꼭대기가 내려다 보인다. 다시 그 반대편에는 박혁거세가 처음으로 도읍했다는 창림사가 자리잡고 있다. 어쨌건 이러한 비교사적 고찰, 혹은 주변 유적지 및 문헌기록을 토대로 할 때 나정은 신라시조 혁거세 탄강신화의 주무대이며, 이곳에 세웠다는 신궁에 모신 주된 신은 박혁거세나 김알지 같은 남성이 아니라 선도성모와 같은 여신일 가능성을 생각케 된다. 

 

▲나정


      이런 점에서 「삼국사기」에서 신궁을 건립한 장소를 하필 "시조가 탄강하신 곳"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는지, 그 의문의 일단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마련된다. 시조가 탄강한 곳은 출생에 비중을 둔 표현이며, 이는 나아가 아버지가 아니라 그 어머니에 중점을 둔 곳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신궁이 고대 중국이나 일본처럼 명백히 건국시조의 어머니를 모신 곳인지 어떤 지는 아직까지 분명치 않으나, 대모신적 사상이 짙게 투영돼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박혁거세는 천자, 즉, 하늘의 아들로 신화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혹시라도 나정에서 확인된 4방8각의 건물지가 천신과 지신의 감응, 혹은 접선 장소를 형상화한 신궁일 지도 모른다.

 

 

 

   이곳이 신궁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제단 시설임이 명백한 이상, 또 그것이 하늘과 땅의 접선을 형상화했음이 명백한 이상, 사각형 담장지와 팔각형 건물지 한복판에 위치한 우물은 과연 무엇을 상징할까?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마련할 수는 없다. 다만 하늘은 양이며 수컷이고, 땅은 음이며 암컷이라는 점에서 하늘과 땅의 접선, 혹은 교접을 형상화한 장치 혹은 시설일 가능성도 내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정

    우물은 일종의 굴(窟)로서 음을 대표하는 땅이 움푹 들어간 곳이며, 아울러 끊이지 않는 샘물로 상징되니, 이와 같은 굴(窟)이 여성의 자궁 신앙과도 밀접하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인류학적 연구성과로 증명되고 있음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노자」에 이르기를 우주만물의 원천을 현빈(玄牝), 곧 검은 암컷과 곡신(谷神), 곧 계곡의 신으로 묘사하고 있거니와 이것이 여성의 그곳을 샘 혹은 우물과 동일시했다는 명백한 방증자료가 된다.

    하지만 나정의 신라시대 우물터였다고 지목한 구덩이는 우물이 아니라 모종의 건축물을 지탱하는 주기둥이 있던 곳이라는 해석도 만만찮다. 이 '우물'흔적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7세기말 문무왕 시대에 세웠다고 생각되는 현재의 나정 유적 팔각형 건물기단 밑에서 확인됐다. 더구나 이 '우물'을 정중앙으로 삼아 그 주위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기둥 구멍들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 유구는 우물이 아니라 기둥이 자리잡았던 흔적이다. 무문전(무늬없는 벽돌)과 돌무더기가 바닥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이들은 나무기둥을 받치기 위한 시설물이다. 뿐만아니라 지하 2m 가량 되는 지점에 심초 시설과 같은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 한쪽 면에서 지상으로 비스듬히 연결되는 도랑과 같은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는 기둥 심초석을 안치하기 위해 마련된 시설이었다. 수직으로 파고 내려간 구덩이 측면 맨 아래쪽에서 시작해 비스듬히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면서 올라가다가 마침내 지표면과 연결되는 긴 고랑과 같은 시설은 중심 나무기둥을 심초석 위에 안치하기 위한 고안이라는 것이다.

 

▲나정

 

 

<2012.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