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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화엄종찰 - 영주 부석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蔥叟 2012. 6. 21. 00:25

해동화엄종찰 - 영주 부석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다가 건물 동쪽의 협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간다. 부석사의 주출입구는 중앙의 어칸이 아니라 동쪽의 협칸이다. 무량수전 안에는 아미타불이 앉아계신다. 아미타불은 범어인 '아미타유스붓다(Amitayus-Buddha : 무한한 광명을 가진 각자<覺者>)'와 '아미타브하붓다(Amitabha-Buddha : 무한한 수명을 가진 각자)'라는 말의 음역이다. 이를 의역하여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무량수불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량수전이라는 전각의 이름도 바로 무량수불에서 온 것이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그런데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통상적 방향인 정면 남쪽을 향해 앉아있지 않고, 건물 서쪽 끝에 앉아 동쪽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의 축과 불상의 축이 직각으로 놓인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여기에는 특별한 교리적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아미타불이 주불인 극락정토는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방정토라고 불려진다. 또 무량수전 동쪽에는 3층석탑이 있다. 무량수전의 전면에는 석탑이 없고 석등만 있다. 동쪽의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는 무관한 독립체이며, 아미타불과 대비되는 석가모니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아미타불은 관음-대세지보살이라는 협시보살을 대동하는데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협시보살이 없는 일승 아미타불(一乘 阿彌陀佛)로써 그는 열반에 들지 않기 때문에 사리묘를 뜻하는 탑을 세우지 않는다.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무량수전 내부에는 일승아미타불이 3층석탑으로 상징되는 동쪽 사바세계를 바라보며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구조이며, 무량수전 앞마당도 교리에 따라 탑을 세우지 않고 광명극락을 뜻하는 석등으로 밝히고 있는 구도, 즉 정토사상의 구도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부석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화엄종찰로 창건하고 신라에 화엄사상을 널리 유포한 사찰이다. 일주문에서 보면 전면에 '태백산부석사'라 하고, 그 후면에 '해동화엄종찰'이라 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부석사는 화엄종의 사찰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가람배치상에서 보면, 무량수전, 안양문 등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의문이 생긴다. 즉 화엄종 사찰에 왜 아미타불일까? 그것은 부석사의 정신적 지주는 화엄사상임에 틀림없으나 그 같은 화엄사상의 정신을 구현화함에 있어서는 아미타불의 정토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고려시대 부석사를 중창한 원융국사는 그의 비문에서 의상대사가 중국의 지엄에게서 화엄사상을 전수받고 그를 홍포하기 위하여 부석사를 세웠는데 불전 내의 상은 아미타불상이고 좌우보처의 협시불을 시립하지 않았으며 불탑도 세우지 않았다고 <화엄경>입법계품에 근거하여 무량수아미타불상이 화엄사상에 근거한 아미타불임을 밝히고 있다. (부석사 원융국사비명, 조선금석총람)

   부석사의 가람은 창건이래 무량수전과 조사당이 중요시되어 왔는데, 이는 가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사당은 창건주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부석사의 창건정신을 중요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무량수전을 중시하고 있었다는 것은 창건정신을 널리 중생에게 홍포(弘布)하기 위해서는 아미타의 신앙이 중요시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부석사 가람의 이해를 위해서 조사당과 무량수전의 상관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무량수전의 뒤편을 보면 우선 불전 바로 앞쪽에 있어야 할 불탑이 오른쪽 언덕 위에 신라양식을 지닌 채 있고, 그 위쪽 70여 미터 지점에 조사당이 있다. 이 조사당은 무량수전과 더불어 고려시대의 목조 건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나, 이 조사당의 가람상의 의미는 부석사가 의상대사에 의해서 창건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보조적 의미로 선묘각과 부석이 무량수전의 좌우에 있어 의상에 의한 부석사의 건립이 어려웠음을 전설적으로 전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

 

   한편 순흥지에 의하면 조사당에서 왼쪽으로 무량수전 상방에 영산전과 나한전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들 양 전각은 부석사가 의상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나, 그 근원은 석가의 최초 설법에 의한 것임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부석사 가람의 중심구조는 무량수전, 안양루 등의 아미타정토적 성격에서 이해되지만, 그 같은 가람이 있게 된 근원은 석가의 무궁한 교설(敎說)에 근거하고 그 무수한 석가의 교설 중 의상은 화엄사상에 의하여 아미타의 정토를 구현하려 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무량수전 상방에 있는 영산전, 나한전, 조사당인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중심축선을 말하면서 나온 아래 중심법당에 관한 문제이다. 이 법당의 이름이 대적광전이었다면 부석사는 화엄사상에 기초하여 아미타의 정토를 구현하려했다는 이론은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라 하겠다.

  

 

 

<2012.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