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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화엄종찰 - 영주 부석사 선묘각

蔥叟 2012. 6. 22. 00:59

해동화엄종찰 - 영주 부석사 선묘각

 

   무량수전 뒤편 좌우에 마치 무량수전을 협시하듯 서있는 선묘각과 부석이 만난다. 부석사의 유래를 살펴보면,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학을 전교(傳敎)한 의상조사는 서기 625년 당시 귀족의 가정에 태어나 호화롭게 성장하였다. 그 뒤 그는 서울 황복사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어 입산수도를 했다. 입산한지 8년 만에 큰 뜻을 품고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향했다. 당나라를 거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까지 가려는 것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이르러 노숙을 하는 어느날 밤, 원효대사는 깨달은 바 있어 인도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귀국한 후 계속 불교 연구에 힘썼던 것이다.

 

▲선묘각

 

   그러나 의상조사는 홀로 당나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조사는 고구려 첩자에게 잡혀 고생을 하다가 귀국하여 650년에 다시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갔다. 양주(楊州)에 이르러서 신병을 얻게 되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유숙하며 병을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善妙)라는 처녀가 있어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의상조사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이에 조사는 선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게 되었다.

 

▲선묘상

 

   어느덧 그녀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한 조사는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선묘가 조사에게 청하기를 "귀국하실 때 이곳을 지나시면 꼭 소녀의 집에 다시 한번 들려 주시고 가십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대사는 이러한 부탁을 쾌히 승락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후 조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 (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唐)이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범하려는 형세 임을 알고, 오직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문무왕 11년에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조사는 귀로에 양주 선묘의 집에 이르니 마침 출타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을 전해 달라고 그녀의 부모에게 부탁한 후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선묘상

 

   한편, 선묘는 조사의 귀국 선물로 법의(法衣)를 정성껏 마련하여 손꼽아 기다리던 중, 잠시 집을 떠난 사이에 조사가 여정이 급하여 머물지 못하고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들어 두었던 선물을 가지고 조사를 뒤좇아 산동성(山東省) 해안에 다다르니 조사가 탄 배는 바다 위에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가 들고 있던 선물을 바닷물에 던지며 축원하기를 "진심으로 조사님을 공양하오니 원컨대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하였다. 때마침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조사가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이를 보고있던 선묘가 다시 축원하기를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지니, 기이하게도 선묘는 바랐던 대로 용이 되어 조사의 멀고 험한 귀국의 길을 줄곧 호위하였는지라,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나라에 당의 침략 흉계를 고하고 난을 면하게 하였다.

 

  

 

<2012.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