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신무왕릉(傳神武王陵)
왕경의 동남쪽에 45대 신왕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5m, 높이 3.4m이다. 민묘와 구분이 안될 정도로 규모가 작다. 봉분 남쪽에는 성덕왕릉 형식으로 추정 복원한 상석이 있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병사를 이끌고 왕경으로 쳐들어가서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를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제45대 신무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협사 궁파에게 말했다.
"내겐 이 세상에 함께 살아나갈수 없는 원수가 있다.-흥덕왕이 죽자 그의 부인 균정을 왕에 추대하려 했으나, 김명 등에 의해 제륭 희강왕이 즉위하였다. 이에 우징은 희강왕 2년(837)에 청해진에 피신하였다. 여기에서 원수는 김명 즉 민애왕이다.- 만일 네가 나를 위해 원수를 없애 준다면 내가 왕위에 올라 네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다."
궁파는 이를 허락했으며,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 그 일을 성취하였다. 그 후 왕위를 빼앗았으므로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하였다.
"궁파는 아주 미천한 사람이오니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옳지않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그 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진을 지키고 있었다.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했다. 이때 장군 염장이 이 말을 듣고 왕께 아 뢰었다.
"궁파가 장차 불충한 일을 도모하려 하오니 소신이 가서 이를 제거하고 오겠습니다."
▲전신무왕릉
▲전신무왕릉
왕은 기뻐하며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왕의 명령을 받들고 청해진으로 가서 인도자를 통해 말했다.
"나는 왕께 조그만 원망이 있소. 그래서 명공에게 의탁하여 몸과 목숨을 보전하려하오."
이 말을 듣고 궁파는 크게 노했다.
"너희들이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폐하고, 어찌 나를 보려 하느냐?"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서 말했다.
"그것은 여러 신하들이 간한 것이오. 나는 그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나를 혐의치 마십시요."
이 말을 듣자 궁파는 청사로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왕의 뜻을 거슬린 일이 있었으므로 공의 막하에 의탁해서 해를 면할까 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
하고 궁파는 말하더니 무척 기뻐하며 술자리를 마련했다.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뽑아 그를 베어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렸다. 이에 염 장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왕께 복명하여 말하기를 "이미 궁파를 베어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에게 상을 내리고 아간의 벼슬을 주었다. 신라 제 46대 문성왕 8년(849)의 일이다.
<삼국유사 신무대왕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조>
장보고의 비극적인 일화는 삼국사기에도 자세히 전한다.
○文聖王立. 八月, 敎曰: “<淸海鎭>大使<弓福>, 嘗以兵助神考, 滅先朝之巨賊, 其功烈可忘耶?” 乃拜爲<鎭海>將軍, 兼賜章服.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8월,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아버지 신무왕을 도와 선왕의 대적을 격멸하였으니, 그의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라는 교서를 내리며, 곧 궁복을 진해 장군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장복을 하사하였다.
○七年, 春三月, 欲娶<淸海鎭>大使<弓福>女爲次妃. 朝臣諫曰: “夫婦之道, 人之大倫也. 故<夏>以<塗山>興, <殷>以<㜪>氏昌, <周>以<褒姒>滅, <晉>以<驪姬>亂. 則國之存亡, 於是乎在, 其可不愼乎? 今, <弓福>, 海島人也, 其女豈可以配王室乎?” 王從之. 冬十一月, 雷. 無雪. 十二月朔, 三日並出.
7년 봄 3월, 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둘째 왕비로 삼고자 했다. 조정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부부간의 도는 사람이 지켜야할 큰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하 나라는 도산을 얻어 흥성하였고, 은 나라는 신씨를 얻어 번창하였으며, 주 나라는 포사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진 나라는 여희로 인하여 혼란하였습니다. 나라의 존망은 여기에 달려있는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 사람인데 그의 딸을 어떻게 왕실의 배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따랐다.
○八年, 春, <淸海><弓福>怨王不納女, 據鎭叛. 朝廷將討之, 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 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 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 投<淸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8년 봄, 청해진의 궁복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지 않는다고 하여 왕을 원망하며, 청해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이들를 토벌하자니 예기하지 못한 후환이 발생할 것이 염려되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처리할 바를 몰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 무주 사람 염장이 용감하고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와서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군사 한 명도 필요없이 빈 주먹만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궁복은 평소 힘센 사람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가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사유를 설명하니, 그들은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전>
▲전신무왕릉
▲전신무왕릉
하지만 신무왕은 2월에 왕위에 오른지 채 6개월이 안된 7월 23일에 병으로 죽었으니 단명한 왕이었다. 그러나 이후 장보고의 청해진은 폐쇄되었으며 그동안 해상권을 장악했던 신라의 위상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신무왕의 죽음과 장지에 관하여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秋七月, 王寢疾, 夢<利弘>射中背, 旣寤, 瘡發背. 至是月二十三日, 薨. 諡白{曰}<神武>, 葬于<弟兄山>西北.
가을 7월, 왕이 병으로 누웠는데, 꿈에 이홍이 왕의 등에 활을 쏘았다. 왕이 잠을 깨어 보니 등에 종기가 났다. 이 달 23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무라 하고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무왕전>
▲전신무왕릉
이 기록에 따라 형제산 서북쪽에 있는 현재의 왕릉으로 경주김씨 문중에서 조선영조 6년(1730)에 비정하였다. 하지만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은 16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부왕의 반정을 지켜보았고 정치적 불운함을 느꼈을 것이므로 이렇게 초라한 능을 조영했을리 없을 것으로 보여 이 무덤은 신무왕릉으로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능의 동남쪽 산이름도 형제봉이지 제형산은 아니므로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2009.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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