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용강동 고분(龍江洞古墳)
이 무덤은 개무덤, 고려장으로 불리던 폐고분으로, 파괴가 심하여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발굴조사하였다. 바닥 지름 16m 정도의 원형봉토로 포장되어 있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둘레돌[護石]을 2줄로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외부의 십이지신상은 사라졌다. 호석에 모접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탱석이 있었을 개연성도 있지만 돌뿌리의 흔적이 없다. 석실의 구조는 남벽의 중앙에 연도가 연결되어 있는 정방형의 단실분으로 네 벽 모두장방형의 깬돌로 정연하게 쌓고 시상 높이에서 내부로 활모양 상태를 이루게 하였다. 시상은 서벽과 북벽에 붙여 동서로 길게 놓여있는데, 벽쪽을 제외한 가장자리에 편평한 깬돌을 쌓고, 그 내부를 깬돌과 냇돌로 채운 다음 점토로 두텁게 바르고 회칠을 해서 마무리하였다.
▲용강동 고분
▲용강동 고분
석실 내에서 사람의 치아와 함께 토용, 흙으로 만든 말, 청동제 십이지신상, 토기, 구슬, 돌베개 등 최고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인물토용은 남자상 15점, 여자상 13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자상에는 문인상이 12점, 무인상이 3점이다. 토용은 생시의 무덤 주인공을 시중들던 사람들을 묘사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신분이나 직능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으며 백토 위에 다시 채색한 것들도 있다. 토용은 높이 12~22cm로 전신상을 흙으로 빚어 만든 뒤 백토를 입히고 그 위에 붉은 색으로 채색한 것이다.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다른 것들에 비해 매우 사실적이다.
청동제12지상은 머리는 동물모습을 하고 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상반신은 벗고 양손을 앞으로 모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7점이 나왔으나 원래는 주검받침을 중심으로 방위에 따라 12점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민애왕릉의 경우 십이지신상이 바깥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용강동고분이 더 늦은 시기에 조영된 왕릉일 개연성도 있다. 출토된 유물의 격으로 보거나 고분의 양식상 돌을 잘 다듬어 축조한 점 등으로 보아 최소한 왕릉급의 고분임에 틀림없다. 또한 신라시대에 돌을 다듬어 쓸 수 있는 것은 왕만이 할 수 있었다.
▲용강동 고분
▲용강동 고분 호석
○眞骨: ...(중략) ... 不磨階石, 不置三重階 ...(하략) ...
진골은, ...(중략) ... 계단 돌을 갈아 만들지 못하며, 3중의 돌층계를 놓지 못한다...(하략) ...
○六頭品: ...(중략) ... 不置巾{中}階及二重階, 階石不磨, ...(하략) ...
6두품은 ...(중략) ... 중계와 이중 층계를 설치하지 못하며, 섬돌을 갈아 만들지 못한다. ...(하략) ...
○五頭品: ...(중략) ... 不磨階石, ...(하략) ...
5두품은 ...(중략) ... 섬돌을 갈아 만들지 못한다, ...(하략) ...
○四頭品至百姓: ...(중략) ... 階砌不用山石 ...(하략) ...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중략) ... 층계와 섬돌에 산돌을 쓰지 못한다. ...(하략) ...
○外眞村主與五品同, 次村主與四品同.
외진촌주는 5품과 같으며, 그 다음 촌주는 4품과 같다.
<삼국사기 잡지 屋舍조>
진골 이하 어떤 계급도 돌을 갈아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돌을 깨어서 사용할 수는 있었다. 따라서 12지신상이 있는 고분은 왕릉임에 틀림없다. 한편 용강동고분의 축조연대에 관하여 면석과 면석을 결합시켜 호석으로 한 점은 탱석에서 십이지신상이 사라지는 전진덕왕릉 이후로 볼 수 있어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호석 원석
▲호석 원석
<200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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