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민애왕릉(傳閔哀王陵)
신라 제44대 민애왕릉으로 전하는 왕릉은 전희강왕릉으로 부터 서쪽으로 약 2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산의 경사면을 깎아내어 평지를 조성한 후 왕릉을 조영하였다. 왕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이고 왕릉의 크기는 직경 12.5m, 높이는 3.8m이다. 내부구조는 횡혈식석실분이다. 외형으로 보았을 때 용강동고분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조영된 양식으로 보인다. 봉분의 둘레에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가공한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올린 후 장방형의 갑석을 올렸다. 호석 주변으로는 5각형의 받침석을 20개 받쳤으나 지금은 17개만 남아있다.
봉분의 호석 주변에는 12개의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고 구멍 속에는 곱돌로 만든 십이지신상을 매납하였다. 그중 자상, 축상, 유상, 해상만 발견되었다. 즉 전진덕왕릉까지는 탱석에 부조로 조각했던 십이지신상이 용강동고분에서는 봉분 안으로 들어갔으며 전민애왕릉에서는 봉분 주변에 묻었다. 능 주변에서는 '元和十年(815년)' 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골호가 발견되었다. 민애왕이 사망한 것은 839년이니 골호의 제작연대로 본다면 이 능은 민애왕릉이 될 수가 없다.능의 외관으로 볼 때 9세기 중후반의 왕릉으로 보이나 골호의 명문으로 인하여 9세기 전반의 왕릉으로 추정된다.
42대 흥덕왕이 죽은 후에 사촌 계열에서 왕위계승전이 벌어진다. 이 싸움에서 첫 승리자는 바로 원성왕의 손자인 재륭(43대 희강왕)이고, 2년 후 그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김명(44대 민애왕)이다. 이어서 김우징은 장보고의 군대를 빌려 서라벌로 진격하여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45대 신무왕이다. 이 싸움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민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이다. 그는 원성대왕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다. 그는 여러 종류의 관직을 거쳐 상대등이 되었던 바, 시중 이홍과 함께 왕을 핍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추존하여 선강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귀보부인은 선의태후라 하고, 아내 김씨를 윤용왕후라 하였으며, 이찬 김 귀를 상대등으로, 그리고 아찬 헌숭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2월, 김 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났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서 김 명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했다. “김 명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홍은 임금과 아비를 함부로 살해하였으니, 그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 원컨대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궁복은 “옛사람의 말에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용기 없는 자’라고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대답하고, 마침내 군사 5천을 그의 친구인 정 년에게 주면서 “자네가 아니면 이 화란을 평정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겨울 12월, 김 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염 장, 장 변, 정 년, 낙 금, 장 건영이 순행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 철야현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 김 민주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켜 싸우게 하였다. 이에 김 양이 낙 금과 이 순행에게 기병 3천을 주어 돌격케 하여, 거의 모두를 섬멸하였다.
2년 봄 윤정월, 김 양의 군사가 주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에 도착하였다. 왕은 김 양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 의훈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김 양의 군사가 다시 한번 싸워 대승하였다. 왕의 군사 중에는 사망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 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다가,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게되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월유택으로 도주하였다. 군사들은 그를 찾아내어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민애왕전>
이어서 민애왕의 장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君臣以禮葬之, 諡曰閔哀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라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민애왕전>
민애왕은 왕궁 밖 서교에서 죽었으니 왕경에서 가장 서쪽에서 죽은 왕이다. 따라서 신라왕경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현재의 능을 민애왕릉으로 지정하였다. 민애왕의 장례와 관련하여 '君臣以禮葬之(신하들이 예로서 장사지냈다)'는 여러가지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즉 장례절차와 무덤을 왕릉으로서의 격식에 맞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골호는 피장자가 사망한 시점에 바로 만들어서 넣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볼 때 이 능은 숙부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애장왕의 능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정상적인 왕릉의 조영이 어려웠을 당시의 상황과 조촐하게 산속에 조영한 왕릉의 위치로 볼 때 애장왕의 비극적 생애와 상통하는 것 같다. 삼국사기는 애장왕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十年, 夏六月, <西兄山城>鹽庫鳴, 聲如牛. <碧寺>蝦蟆食蛇. ...중략... 秋七月, 王叔父<彦昇>與弟伊湌<悌邕>, 將兵入內, 作亂弑王. 王弟<体明>侍衛王幷害之. 追諡王爲<哀莊>.
10년 여름 6월, 서형산성 소금 창고에서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벽사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왕의 숙부 언승이 그의 아우 이찬 제옹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였다. 왕의 아우 체명이 왕을 시위하고 있다가 함께 살해당했다. 왕의 시호를 애장으로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애장왕전>
신라왕릉 조영양식상으로 볼 때 판석으로된 호석을 두른 전진덕왕릉이나 용강동 고분에서 3단의 장대석과 갑석으로 만든 전민애왕릉으로 변한 후 갑석이 없어지고 4단의 호석으로 된 전헌강왕릉을 거쳐 다시 2단으로 줄어든 전정강왕릉의 양식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민애왕릉 가는 길
▲전민애왕릉
▲전민애왕릉
▲전민애왕릉
▲전민애왕릉
▲전민애왕릉
▲전민애왕릉
▲전민애왕릉
▲호석, 갑석, 받침석
▲호석, 갑석, 받침석
▲호석, 갑석, 받침석
<200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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