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진덕왕릉(傳眞德王陵)
현재 진덕왕릉으로 전해지는 이 고분은 1730년까지만 해도 피장자를 모르던 왕릉이었다. 1730년(영조 6년) 경주 김씨들이 당시까지 전해지던 10기의 신라왕릉 이외에 17기의 왕릉을 지정하면서 이 고분을 진덕왕릉으로 지정하였다. 고분의 축조방법으로 볼 때 왕릉임이 분명하지만 전승과정을 잃어버려 아쉬움을 주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덕왕은 현재의 오릉이 있는 탑동과 내남면 일대로 비정되는 사량부에 장사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八年, 春三月, 王薨. 諡曰<眞德>, 葬<沙梁部>
8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전>
하지만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문헌기록의 중요성보다 능의 수를 맞추는데 급급하여 9세기 전반의 왕릉을 7세기 초중반의 인물이었던 진덕왕릉으로 지정해버렸다. 왕릉의 양식적인 분석해 보면 진덕여왕시대에는 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을 두르는 양식이 출현하지 않았으며, 십이지신상의 조각의 양식도 신라하대인 9세기 전반의 양식이다. 성덕왕릉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십이지신상조각은 42대 흥덕왕릉까지는 부조가 높고 조각솜씨가 뛰어났다. 그러나 이곳의 조각은 부조가 낮은 평면화되어 그 솜씨가 퇴화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난간석도 없어졌다. 석인상이나 상석, 난간석도 사라졌다.
흥덕왕 사후에는 왕실 내에서 왕위계승전쟁에 휩싸여 쿠데타에 의해 살해당한 왕의 능을 잘 만들어줄 리도 없었으며 국력의 약화로 인하여 왕릉을 화려하게 만들어줄 능력도 없어졌으며 자연히 조각기술마저도 퇴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하대의 왕릉은 십이지신상을 아예 만들지 않았거나 만들었더라도 장식이 없어지고 규모가 작아졌다. 이 능은 9세기 전반의 양식으로 구정동방형분의 조각보다 조금 뒤지는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다만 규모가 좀더 클 뿐이다. 따라서 구정동방형분과 비슷한 시기의 왕릉으로 볼 수 있어 45대 신무왕릉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매우 불운하였던 신무왕이지만 아들인 46대 문성왕이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부왕의 능을 격식을 갖추어 정성껏 조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퇴화되어버린 조각솜씨나 기술은 다시 되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흥덕왕 이후 쇠퇴해가는 왕릉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러차례에 걸쳐 북쪽을 파고 도굴당한 적이 있으며 선덕왕릉 이후 산 경사지를 깎아 평지를 조성한 후에 능을 만들었다. 왕릉의 능선 위에 배장묘로 보이는 무덤이 보인다.
▲전진덕왕릉 가는 길
▲전진덕왕릉
▲전진덕왕릉
▲전진덕왕릉
▲전진덕왕릉
▲전진덕왕릉
▲전진덕왕릉
▲전진덕왕릉
▲십이지신상(호랑이)
▲십이지신상(토끼)
▲십이지신상(용)
▲십이지신상(뱀)
▲십이지신상(말)
▲십이지신상(양)
▲십이지신상(돼지)
▲배장묘
<200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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