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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천 월정교터(月精橋址)

蔥叟 2008. 11. 25. 08:21

경주 남천 월정교터(月橋址)

  

월정교(月精橋)는 월성에서 남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 위에 놓여져 있던 다리이다. 이곳은 왕궁 바로 남쪽으로 오늘날로 치면 종로 1번지에 해당한다. 삼국시대에는 궁궐인 월성의 서쪽문인 귀정문(歸正門)을 지나 오늘날 경주공고 옆의 서천에 놓여있던 송교(松橋) 또는 금교(金橋)를 통해서 중국으로 갔으며 지금의 터미널 남쪽지점에서 사신을 맞이하곤 했었다. 그러나 통일 후 월정교가 가설되면서부터는 주로 월정교를 이용하였다. 월정교는 750년 전후 경덕왕 때에 만들어진 다리로써 동쪽의 일정교와 함께 가장 규모가 크고 튼튼한 다리였었다. 신라 992년의 역사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문화적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이다.

 

이 다리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고려시대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월정교를 주제로 한 시의 내용 중 「홍교도영조문천(虹橋倒影照蚊川)」이라는 구절에서 알아볼 수 있다. 즉 ‘무지개 다리’(虹橋)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구름다리를 이르는 것이다. 이 시가 동국여지승람 경주고적조에 전하고 있어 월정교는 남천을 건너는 가장 중요한 다리로 고려시대까지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은 다리는 무너졌지만 그 교각이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옛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80년대에 복원계획을 세우고 발굴한 결과 교각지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공사비 때문에 복원계획은 계획으로만 끝나버리고 교각지만이 옛 모습을 지닌 채 물소리만이 잔잔히 들리고 있다. 또한 1280년 일연 스님이 입적하기 9년 전에 보수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월정교는 1984년부터 86년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북측교대와 남측교재의 거리가 60.56m이며 그 사이에 4개의 교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교각간의 거리는 12.55m이며 남북교대와 교각간의 거리는 11.46m였다. 월정교는 다리의 전체 길이가 약 63m, 폭 11m정도의 큰 다리였음을 아 수 있다. 충담 스님이 삼화령에서 경덕왕의 부름을 받고 이 다리를 건너서 귀정문을 통해서 월성으로 들어갔다.

 

월정교 서쪽 약 19m 아래 지점에서는 목교(木橋)의 교각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나무의 종류는 잣나무였다고 한다. 개울 바닥 깊숙히 묻혀 있어 부패되지 않고 잘 보존된 채로 발굴된 이 목교의 교각간의 간격은 4.9m로 8개가 확인됐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와 요석공주의 전설이 어려있는 유교(楡橋)가 있었는데 느릎나무가 아닌 잣나무 유적이 발견됨으로서 후대에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천에는 이처럼 여러개의 다리가 놓여있어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이루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줬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단 하나의 다리도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북천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것은 당시에 북천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명활산 쪽에서 흐르는 물은 경주분지를 가로질러 여러 개의 실개천 형태로 흘렀던 것이다.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교각 이음새

 

▲월정교터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十字수로

 

▲월정교터 목부재

 

▲월정교터 목부재

 

 

 

<2008.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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