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사자 - 경주 흥덕왕릉 석사자상
석사자상은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을 양식화한 예술품으로 불사자(佛獅子), 석견(石犬), 불사(佛獅)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흔히 사자란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조복시키는 백수의 왕으로서 신격화되거나 제왕으로 상징되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 용맹함 때문에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 인도에서는 제왕과 성인의 위력을 사자에 비유하여 불교경전에서도 석가를 '인중사자(人中獅子)'라 칭하고 그 설법 또한 모든 희론(戱論, 쓸모없는 이론)을 멸하는 것에서 '사자후(獅子吼)'라 하였다.
▲석사자상
▲석사자상
▲석사자상
더욱이 '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에서는 사자가 크게 울면 모든 마귀들이 두려워하여 따른다는 기록이 있으며 화엄경이나 법화경에는 '사자분신(獅子奮迅)'이라고 하여 부처가 대비(大悲)를 일으키는 것을 마치 사자가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양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대지도론(大智度論)' 권4에는 불상의 32길상 중에 '상신여사자상(上身如獅子相, 상체의 위용과 단정함이 사자와 같다)'이라든다 '사자협상(獅子頰相, 두 볼의 통통함이 사자와 같다)'등 부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사자를 비유했을 뿐 아니라 석가불, 비로자나불, 및 문수보살의 대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능묘의 사방을 지키는 석사자상은 도립된 환조상인 석수(石獸)로 나타나고 있다. 능묘 앞의 석사자상은 중국 당대(唐代)의 묘의제도(墓儀制度)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석사자상은 능침(陵寢)의 문을 수호하는 것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한 쌍을 마주보게 세우며 왕릉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석사자상이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앞에 배치된 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탑의 사자 형식과 당대의 묘제가 혼합되어 독특한 능묘 형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석사자상
▲석사자상
▲'王'자 새김 목걸이
흥덕왕릉의 석사자상은 왕릉 주변의 네 모서리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모습이다. 그중에서 동남쪽 모서리에서의 사자상은 앞발을 나란히 내딛고 상체와 머리를 곧게 쳐들어 정면(西南向)을 바라보고 있다. 양쪽 눈 옆에는 둥글게 말린 귀가 있고, 유난히 툭 튀어나온 눈에 코가 커다랗고 펑퍼짐하다. 코 아래에는 아래위로 맞문 송곳니를 크게 표현하였으며 어금니는 보이지 않는 다. 고개를 쳐들어 볼과 입이 많이 돌출되었으며 입 옆으로 털갈기의 표현이 있다. 목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털이 일정한 길이와 굵기로 층을 이루며 중앙을 향해 좌우대칭으로 나선형을 이루었다. 목의 중앙에는 목렁이에 달린 메달의 표현이 있으며, 목걸이 메달 양쪽 옆으로 두 가닥씩의 머리털이 물결지게 내려졌다. 메달의 중아에는 '王'字가 표현되었다.
앞발을 꼿꼿이 세워 상체를 지탱하며 배를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앞으로 내디딘 앞발톱이 뾰족하며 굵직한 대퇴부의 뒷다리 뒤꿈치에도 털갈기의 표현이 있다. 엉덩이 위로 올려진 꼬리는 가운데로 모여 중앙에서 상하좌우 대칭으로 4개의 나선형을 이루는 와문(渦紋)이 표현되었다. 이 석사자의 체구는 나머지 세 마리보다 크며 시원스러운 자세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나머지 세 마리에서 보이는 장식적이고 도식화된 면이 이 석사자상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남아있는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王'字 명문
<2008.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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