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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남리절터(傳念佛寺址)

蔥叟 2008. 11. 24. 08:29

경주 남산 남리절터(傳念佛寺址)

 

   남리절터라 불려지는 이곳은 현재 석탑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지금은 기초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마도 연내에 석탑이 복원되면 남산의 또하나의 명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서쌍탑이 잇고 지금까지 동탑의 부재와 이거사터 석탑부재를 섞어서 구정동 로타리에 족보없는 석탑으로 서 있던 탑이 이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엇다. 복원공사 과정에서 동탑의 부재만이 아니라 서탑의 부재도 구정동으로 이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는게 윤만걸 석공예 명장의 설면이다. 남리 절터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염불사터로 전해지고 있다.

 

▲남리절터 서탑터

 

▲남리절터 서탑터

 

   남산의 동쪽 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라는 마을이 있고 마을에는 절이 있는데 마을 이름을 따서 피리사라고 이름지었다. 절에는 범상찮은 중이 있어 성명을 말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염불을 외워 그 소리가 성중에까지 들려 360동리 17만 호 치고 안 들리는 데가 없었다. 염불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그냥 옥과 같은 소리가 한결같았다. 이로써 이상하게들 여겨 누구나 정성껏 공경하고 모드가 염불 스님(念佛師)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가 죽은 후에 흙으로 그의 형상을 빚어 민장사(敏藏寺)가운데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는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절 옆에 또 절이 있어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고 하였으니 마을 이름에 따라 이름짓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 염불사(念佛師)조>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서라벌의 도시 규모이다. 17만호라고 했는데 호당 5인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85만 명의 대도시이다. 조선시대 최전성기에 한양의 인구가 30만명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17만호가 아니라 17만명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또 경주분지에는 85만명의 인구가 살 수 있는 공간이 못되다고도 한다.

 

▲남리절터 서탑터

 

▲남리절터 석탑부재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경주의 범위를 명활산, 남산, 금강산, 선도산을 경계로 그 안쪽만을 생각한 결과이다. 서라벌의 범위는 신라 6부 전체를 왕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왕경은 동으로 외동, 서로는 건천, 아화, 남으로는 내남, 북으로는 안강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때 80만 인구의 거주지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진한 6촌이 산곡에 분거하였고 6촌이 발전하여 신라 6부가 되었다는 기록과도 합치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염불사터의 석탑재들을 바라보면 유적이 무너지고 흩어진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석탑뿐만 아니라 금당터에는 이미 호화로운 전원주택이 여러 체 들어서 있는데 발굴도 하지 않은 채 집을 지었다고 한다. 남산을 사적으로 지정할 때 산자락까지만 포함시켰고 주변 지역을 사적에서 제외하였으며 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남산 정비 5개년 계획 가운데 천관사터, 인용사터와 더불어 염불사터도 정비한다고 하는데 우선 동서 쌍탑만이라도  복원된다면 칠불암을 오르는 답사객이나 등산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않을까?

 

▲남리절터 서탑터

 

▲남리절터 지붕돌

 

   신라시대에는 스님의 소상(塑像)을 만드는 것이 유행했던 것 같다. 분황사의 원효대사도 소상을 만들었고,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 그리고 광양 옥룡사의 도선국사도 소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죽자 설총이 그 해골을 부수어 그의 모습을 빚어 분황사에 모셔 한평생 경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당시 설총이 옆에서 예배를 하니 소상(塑像)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아직 몸을 돌린 채로 있으며 원효가 살던 구멍 절(穴寺)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조>”는 기록도 전한다. 

 

▲층급받침

 

 

 

<2008.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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