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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구황동 왕릉터(王陵址)

蔥叟 2008. 11. 18. 08:16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구황동 왕릉터(王陵址)

 

   신라 왕경의 중심에 있어 수미산으로 추앙되던 낭산의 동북단에 황복사터가 있고 그 동쪽에 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조유구가 있다. 이곳에는 둥글게 놓여져 호석으로 여겨지는 석물이 여러개 놓여져 있는데 그 크기가 모두 1.5m를 넘는다. 또한 이곳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탱석도 있었는데 왕릉이 붕괴된 이후 서쪽의 황복사터로 옮겨졌다. 현재 황복사 금당터에는 온전한 7상과 상반신이 파손된 한 상이 남아있고, 寅像, 辰像, 申像, 酉像, 戌像은 없어졌다.  

 

▲구황동 왕릉터

 

▲구황동 왕릉터

 

   그중에서 寅像은 능지탑에 복원되어 있고, 戌像은 머리부분만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 십이지신상 탱석은 모두 1m가 넘어 왕릉의 호석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터의 십이지신상과 왕릉터에 남아 있는 석물이 왕릉에 쓰인 십이지신상임을 증명하는 것은 면석의 앞면을 완만한 곡면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는 왕릉이 원형이기 때문이며 본래부터 금당의 기단부를 장식할 목적이었다면 평면으로 처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황복사 동편의 유구는 왕릉임이 확실하다. 더구나 신라시대에 돌을 다듬어 쓸 수 있는 것은 왕만이 할 수 있었다. 

 

▲구황동 왕릉터

 

▲구황동 왕릉터

 

○眞骨: ...(중략) ... 不磨階石, 不置三重階 ...(하략) ...

진골은, ...(중략) ... 계단 돌을 갈아 만들지 못하며, 3중의 돌층계를 놓지 못한다...(하략) ... 

 

○六頭品: ...(중략) ... 不置巾{中}階及二重階, 階石不磨,  ...(하략) ...

6두품은 ...(중략) ... 중계와 이중 층계를 설치하지 못하며, 섬돌을 갈아 만들지 못한다.  ...(하략) ...

 

○五頭品: ...(중략) ... 不磨階石,   ...(하략) ...
5두품은 ...(중략) ... 섬돌을 갈아 만들지 못한다,  ...(하략) ...

 

○四頭品至百姓:  ...(중략) ... 階砌不用山石 ...(하략) ...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중략) ... 층계와 섬돌에 산돌을 쓰지 못한다.  ...(하략) ...
 

○外眞村主與五品同, 次村主與四品同.

외진촌주는 5품과 같으며, 그 다음 촌주는 4품과 같다.

 

<삼국사기 잡지 屋舍조>

 

▲구황동 왕릉터

 

▲구황동 왕릉터

 

   진골 이하 어떤 계급도 돌을 갈아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돌을 깨어서 사용할 수는 있었다. 따라서 돌을 갈아서 만든 12지신상이 있는 고분은 왕릉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구황동 왕릉터는 누구의 왕릉이었을까? 윤경렬과 강우방은 신문왕릉으로 추정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에 신문왕의 장지를 '낭산동쪽에 장사지냈다(葬於狼山東)'이라 기록하였고 황복사 삼층석탑의 금동사리함에 확인되듯이 신문왕의 원찰이 바로 황복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천의 범람으로 인하여 왕릉이 유실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또한 십이지신상 면석은 황복사 금당터의 것이고 십이지신상은 약사여래의 권속이므로 약사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동편의 왕릉터는 황복사 창건 당시의 목탑터로 추정하였다.  

 

▲왕릉터 석재

  

▲왕릉터 석재

 

   하지만 황복사 금당터의 십이지신상은 간지의 순서와도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어딘가에서 옮겨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성덕왕릉에서 밝혀지겠지만 십이지신상이 왕릉에 처음으로 조영되는 것은 성덕왕릉에서 였으며 이후 면석에 십이지신상을 부조한 왕릉이 등장한다. 따라서 구황동 왕릉터는 성덕왕릉보다 후대에 만들어 진것이 확실하므로 신문왕릉이 될 수는 없다.

 

▲왕릉터 석재

 

▲왕릉터 석재

 

   그러면 왕릉의 피장자는 십이지신상이 세겨진 왕릉이 조영되던 시기인 성덕왕릉에서 흥덕왕릉 사이의 왕릉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왕은 누구일까? 먼저 성덕왕릉은 현재의 성덕왕릉이며, 효성왕은 화장하여 동해에 뼈를 뿌렸으며, 경덕왕릉은 전김유신묘로 추정되며, 혜공왕은 시해당하여 능의 존재여부가 불명확하다. 선덕왕도 산골하여 동해에 뼈를 뿌렸으며, 원성왕릉은 괘릉이며, 소성왕릉은 전경덕왕릉으로 추정되며, 애장왕도 시해되어 왕릉의 존재여부가 불명확하다. 헌덕왕릉과 흥덕왕릉은 실전하고 있다.

 

▲왕릉터 석재

 

▲왕릉터 십이지신상(말)

 

   이처럼 어느 왕도 구황동 왕릉터의 피장자로 추정될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횡혈식석실분의 경우 추가장이 가능한 장법이므로 왕비의 경우는 왕과 합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화장하여 산골한 왕의 경우 왕비는 어떻게 장사지냈을까? 구황동 왕릉터는 화장한 왕의 왕비를 모신 능은 아닐까? 여기에 해당하는 왕비로는 문무왕비인 자의왕후(慈儀王后 ), 효성왕비, 선덕왕비인 구족부인(具足夫人)이 해당할 것이다.  

 

▲왕릉터 십이지신상(뱀)

 

▲십이지신상(소, 1930년대 노세 우시조(能勢丑三)촬영)

 

 

 

<2008.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