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신문왕릉(傳神文王陵)
낭산 남쪽의 사천왕사터에서 동남쪽이며 망덕사 동쪽에 신문왕릉으로 전하는 능이 있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이며 내부구조는 횡혈식석실분이다. 왕릉의 봉분자락에는 이전 시기와는 달리 벽돌처럼 잘 다듬은 治石을 사용하여 지대석 위에 5단으로 호석을 쌓은 뒤 그 위에는 신라 왕릉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蓋石인 甲石을 올렸다. 호석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게 130~145cm 정도로 쌓았다. 받침석은 괴석으로 두른 무열왕릉과는 달리 정밀하게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였다. 받침석은 너비 54~60cm, 두께 47~60cm, 앞면길이 143~163cm 내외의 사다리꼴로 44개를 다듬어 127~155cm 내외의 간격으로 호석에 기대놓았다. 받침석은 호석의 붕괴를 막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장식의 효과까지 더하였다.
▲전신문왕릉
▲전신문왕릉
▲전신문왕릉
정남쪽에 놓인 받침석의 윗부분에는 '門'字를 새겨놓아 이곳이 현실로 들어가는 연도 입구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 통하여 전신문왕릉은 현실에 추가장을 할 수 있는 횡혈식석실분임이 명확하다. 왕릉의 동족에는 상석이 놓여 있는데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축조한 것인데 앞부분에 계단이 놓여있는 것을 제외하면 무열왕릉의 상석과 같은 양식이다. 다만 무열왕릉의 것은 1단으로 되어 있다. 이후의 상석은 모두 탁자식으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혼유석은 영혼이 나와서 노는 자리이고 상석은 제수품을 진설하는 자리이다. 조선시대에는 무덤 바로 앞에 혼유석을 설치하고 상석은 정자각이 상석의 역할을 하였다. 만약 전신문왕릉의 구조물이 상석이라면 계단이 필요없을 것이다. 따라서 계단은 왕의 영혼이 올라가는 길이라면 상석과 혼유석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신문왕릉
▲받침석
▲호석
그런데 조선전기의 기록인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모두 신문왕의 아들인 효소왕릉이 '(경주)부의 동쪽 분남리에 있다(在府東芬南里)'고 하여 전신문왕릉이 효소왕릉임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葬于望德寺東)', '(효소왕)능이 망덕사 동쪽에 있다(陵在望德寺東)'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점필재 김종직의 시에는 "오직 밭 갈던 농부 상석(床石)에서 밥 먹네” 라고 하여 효소왕릉에 상석이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신문왕은 낭산동쪽에 장사지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十二年, 秋七月, 王薨. 諡曰<神文>, 葬<狼山>東.
가을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전>
조선 영조 6년(1730)에 경주김씨 문중에서 당시에 경주지역에서 불국사로 가는 방향을 동쪽으로 간주하였던 관례에 따라 이곳을 낭산의 동쪽에 있다는 신문왕릉으로 지정하고 효소왕릉은 도지동의 성덕왕릉 입구 고분으로 지정해버렸다. 도지동은 결코 분남리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門'자 받침석
▲상석
▲전신문왕릉
<200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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