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성덕왕릉(聖德王陵)
전효소왕릉의 동편 약 100m 지점에 33대 성덕왕릉으로 전해지는 왕릉이 있다. 봉분높이는 4.5m, 직경은 14.65m의 원형봉토분이며 내부구조는 횡혈식석실분이다.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삼국유사,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등의 기록도 현재의 왕릉과 일치하고 있다.
○三十六年, 春二月, 王薨. 諡曰<聖德>, 葬<移車寺>南.
36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성덕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전>
○陵在東村南一云楊長谷
왕릉은 동촌 남쪽 - 일명 양장곡 - 에 있다.
<삼국유사 왕력>
○在府東都只谷里
(경주)부의 동쪽 도지곡리에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특히 도지곡리는 현재의 지명인 '도지리'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문헌기록과 현재의 왕릉은 정확히 일치한다.
▲성덕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은 무열왕 이후부터 발전해오던 신라 능묘양식이 집대성되어 완성기에 이른 양식이며 여기에는 불교적인 사상적 배경과 함께 중국 황제릉의 양식이 잘 조화된 한국 능묘 양식의 완성이라고 여겨진다. 왕릉의 양식을 살펴보면 먼저 왕릉의 호석은 면석 30개를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는데, 면석과 면석 사이에는 탱석 30개를 끼워서 판석을 고정시켰다. 앞선 왕릉인 전신문왕릉(효소왕릉)에서는 5단의 호성을 쌓아올린데 비하여 성덕왕릉에서는 면석으로 대체되었으며 갑석도 장대석으로 바뀌었다. 외부에는 전신문왕릉의 사다리꼴과 달리 삼각형으로 가공한 받침석 33개를 탱석에 기대어 호석을 보강하였다. 이어 환조로 조성한 십이지신상을 삼각형 받침석 사이의 공간 33곳 가운데 고유한 방향에 최대한 맞게 선택한 후 추가적으로 배치하였다. 중간바닥인 회랑에는 판석을 깔았으며 그 가장자리에는 인도의 불탑을 모방한 난간석 33개를 둘렀다.
▲석인상
▲석인상
▲석인상
▲석인상
그런데 호석의 받침석 사이에 놓은 십이지신상은 중앙에 놓여있지 않고, 좌우로 이동하여 배치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을 강우방은 성덕왕의 아들인 효성왕이 처음 성덕왕릉을 조영할 때에는 십이지신상에 대한 고려없이 왕릉을 조영하였다가 5년 뒤에 왕위에 오른 경덕왕에 의하여 새로운 왕릉양식인 십이지신상을 추가로 배치하면서 효성왕이 만든 기존의 양식에 손상 없이 최대한 십이지신상의 방위에 맞추어 하려다 나타난 현상으로 보았다. 십이지신상을 정확한 방향과 간격으로 배치하려면 12의 배수인 24곳 또는 36곳의 공간이 있어야 함에도 삼각형의 받침석이 33개여서 그 사이의 공간도 33개가 되므로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경덕왕 13년조 기사 '13년 5월, 성덕왕의 비석을 세웠다.(十三年 五月, 立聖德王碑)'는 기록과도 부합한다.
십이지신상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만들기 시작하였고 위진남북조시대에는 글씨로 새겨서 관 옆에 두었으며, 수나라 대에는 그림으로 그렸고, 당나라 대에는 흙으로 소조상으로 만들어 역시 관 옆에 두었다. 이를 받아들인 신라에서는 무덤 밖에 조영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신라는 중국의 황제가 사망했을 때 조문사절로 가서 장례절차를 참관하였을 것이고 이때 십이지신상 배치에 관한 정보를 얻어와 이를 신라왕릉에도 구현하였을 것이다. 십이지는 고유한 방향을 지키는 방위신이며 불교에서는 약사여래의 권속신장으로 왕릉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왕릉의 피장자는 왕이 아니라 열반한 부처가 누워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석사자상
▲석사자상
▲석사자상
▲석사자상
33개의 난간석도 신라왕릉에만 조영된 시설이다. 중국의 황제릉에도 없으며 일본의 천황릉에도 없다. 다만 인도의 스투파인 산치대탑이나 바르후트대탑에서나 볼 수 있는 조형물이다. 난간석은 중국의 구법승이나 신라의 구법승에 의하여 인도의 진신사리탑 모양이 신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도 십이지상과 마찬가지로 경덕왕이 처음으로 구현한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의 사상적 배경은 바로 세속의 왕이 아니라 절대자인 부처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로써 성덕왕릉은 단순한 왕릉이 아니라 불국토로 구현된 것이다. 즉 성덕왕릉은 황제즉여래사상을 반영한 조형물인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불교는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먼저 5호16국시대에 전진․후진․북위 등으로 대표되는 북방 불교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고 불교는 황제의 권력 밑에서 정치적인 자문역할을 수행하면서 승단의 생명보호를 보장받으며 불법을 유지해 나간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구려와 신라의 불교가 북방불교 계통이다. 반면 남방불교는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이들의 정치 이념은 유교와 도교였다. 원칙적으로 한족사회에서는 승려들의 사상은 출가자의 법은 불법뿐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따라서 출가자(出家者)는 황제에게 절을 하는 것도 거부했으며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군대에도 가지 않았다. 따라서 한족의 불교는 순수종교로만 발전했다. 남방불교는 백제에 전파되었다.
▲상석
▲상석
▲십이지신상(쥐)
▲십이지신상(축)
이렇게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북방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에서는 불교가 호국불교 형식으로 발전한다. 호국불교에서는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으로 발전한다. 즉 황제와 부처는 동격화(同格化)되고 황제는 권력 유지에 승단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경덕왕은 신라 천년을 통하여 왕의 전제권력이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의 왕이다. 경덕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성덕왕의 무덤을 석가모니의 무덤모양과 똑같이 만들었던 것이다.
성덕왕릉의 남서쪽에는상석이 놓여있는데, 윗면은 2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고, 옆면은 안상을 조각하였다. 전신문왕릉(효소왕릉)에서 보이던 계단은 보이지 않는다. 계단이 없다는 것은 배례석이 아님을 명확히 한 것이다. 상석은 정남에서 오른쪽, 즉 남서쪽으로 살짝 비켜 서 있다. 이것은 선대 왕릉가지 보이지 않았던 석인상과 석사자를 배치하게 됨에 따라 동쪽에 배치하던 것을 남쪽으로 옮겨 배치하게 되었으며 정면이 아니라 살작 비켜 세운 것은 추가장을 할 대에 불편함을 피하고자 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십이지신상(인)
▲십이지신상(묘)
▲십이지신상(진)
▲십이지신상(사)
왕릉의 남쪽 동서 양쪽에는 2구의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고 사방을 돌아가며 석사가 4구가 서 있다. 석인상과 석사자는 중국의 당나라 황제릉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조형물로서 그 양식을 신라가 받아들이 것이다. 석인상의 앞면은 홀(忽)이 없는 평복을 입은 문인상 형태이로 다리 사이에 칼을 들고 있으며. 뒷면은 의장용 갑옷인 양당개를 입었다. 즉 문무인의 상징성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석사자는 원래 중국 황제릉에서 동서남북의 문에 각각 2마리씩 모두 8마리를 배치하였으나 신라왕릉에서는 왕릉의 모서리에 한마리씩 세우고 공간을 확보하였다. 인도에서는 사자가 부처님을 지키는 최고의 상징적 동물이다. 이처럼 성덕왕릉에는 중국 황제릉의 묘소와 인도 불탑의 요소가 함께 나타나는 새로운 신라 왕릉양식이 집대성된 왕릉이고 이는 신라 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의 왕릉양식에 까지 계속 되는 한국 왕릉 양식의 고전이 된 것이다.
▲십이지신상(미)
▲십이지신상(유)
▲십이지신상(술)
▲십이지신상(해)
성덕왕릉 앞 100m 앞에는 경덕왕 13년에 세워진 성덕왕릉의 비를 떠받치던 귀부가 있다. 물론 비신과 귀부는 없어졌다. 삼국사기 경덕왕 13년조에는 성덕왕의 능비를 세웠다는 기사가 있다. 능비를 세움으로써 왕릉의 조성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귀부는 많이 파손되었지만 규모가 웅대하며 방형의 대좌위에 놓여있다. 몸체는 앞발에 5개의 발톱이, 뒷발에는 4개의 발톱이 새겨져 있고, 등에는 6각의 거북등무늬가 전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신홈이 없어 귀부위에 비신을 그대로 얹어 두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비신이 매우 무겁고 폭이 매우 넓어 비신홈이 없어도 넘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릉이나 전김인문묘의 귀부는 전각 속에 세워져 있었으나 성덕왕릉에는 전각 없이 노천에 세워져 있다. 현재 신라 왕릉에 세워진 비는 성덕왕릉, 무열왕릉, 흥덕왕릉, 그리고 전김인문묘에 세워진 4기가 남아있으며 김유신묘에도 비를 세웠던 것으로 전한다.
▲난간석
<200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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