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진흥왕릉(傳眞興王陵)

蔥叟 2008. 11. 5. 08:04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진흥왕릉(傳眞興王陵)

  

선도산의 동남쪽 경사면에 24대 진흥왕릉이라고 전하는 고분이 있다. 지름 20m, 높이 5.8m 되는 타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묻혔고 몇 개만이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또 산사면의 말단부 일부를 깎아낸 후 평지의 능역을 조성한 뒤에 조영하였다. 이와 같은 무덤 양식은 선덕여왕릉 이후 주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던 방법이다. 삼국시대에는 자연 능선을 허물지 않고 개별 능역을 조성하지 않았다. 현재의 능은 삼국사기에 '애공사북봉에 장사지냈다(葬於哀公寺北峰)'는 기록과 동남쪽 아래에 있는 서악동 삼층석탑을 근거로 조선 영조 6년(1730)에 경주김씨 문중에서 지정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 고분이 진흥왕릉으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현재의 전진지왕릉을 진흥왕릉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평해왕씨 시조인 '황정묘'에 대하여 '왕릉주변에 민묘를 쓸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황정묘도 시기만 진흥왕릉보다 빨랐을 뿐이지 가짜 묘지명을 묻어두고 묘지명이 발견되었기에 황씨 입향조의 묘라고 지정한 것에 불과하다. 경주김씨들은 동천동에 경순왕릉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1748년에 경기도 장단에서 현재의 경순왕릉을 찾기도 하였기 때문에 평해황씨들은 '경주김씨들은 왕릉이 아닌 것을 왕릉이라고 주장한다 '하여 산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다시 조정하여 제일 위에 있는 현재의 진흥왕릉을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고분은 규모에 있어서나 위치로 보나 전혀 사실과 다르게 지정된 고분이다. 현재의 고분은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임에는 틀림없으나 진흥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의 장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三十七, 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峯.

37년 가을 8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전> 

 

29대 무열왕의 능은 『삼국사기』에는 영경사의 북쪽(葬永敬寺北)에 『삼국유사』에는 애공사의 동쪽(葬於哀公寺東有碑)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무열왕릉의 위치는 확실하므로 진흥왕릉은 무열왕릉과 동일 영역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무열왕릉과 같은 능역에 있는 서악동 고분군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전진흥왕릉

 

 

 

<2008.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