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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법흥왕릉(傳法興王陵)

蔥叟 2008. 11. 4. 08:06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법흥왕릉(傳法興王陵)

 

   선도산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능선 중복의 동쪽 사면에 신라 23대 법흥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고분이 있다. 왕릉은 능선 경사면을 이용하여 봉분을 조성하였는데 봉분형태는남북장축의 타원형이며 봉분의 북쪽에 받침석으로 보이는 塊石이 일부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봉분자락에 호석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능 뒷부분은 반달모양으로 두둑하게 쌓은 토성 모양의 莎城이 있다. 무덤 주위에 사성을 하는 습속은 고려시대 이후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는 법흥왕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二十七年, 秋七月, 王薨, 諡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峯.

27년 가을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삼국사신라본기 법흥왕전>

 

陵在哀公寺北.

능은 애공사북쪽에 있다.

 

                                                                                                                      <삼국유사 왕력>

 

   현재의 전법흥왕릉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과 능 동편의 외외리에 있는 효현동 삼층석탑을 근거로 조선 영조 6년(1730)에 경주김씨 문중에서 정한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그대로 국가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즉 효현동 삼층석탑이 자리한 곳을 애공사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전법흥왕릉

 

▲전법흥왕릉

 

▲전법흥왕릉

 

   법흥왕은 신라의 율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왕호를 사용한 임금이다. 법흥왕 이전의 왕들은 그 칭호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으로 불렸다. 마립간 이전의 시기에는 국가라는 정치 체제가 없이 소국단위의 지도자 내지는 추장 정도의 지위를 가졋던 것으로 보고 있다. 내물왕에서 지증왕까지 사용되었던 마립간이란 칭호도 이전보다 권력이 더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지배체제는 귀족연합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한 것이 바로 화백회의 였으며 마립간은 화백회의를 주재하는 정도의 지위 만을 갖고 있었다.

 

癸未年九月艹五日沙啄至都盧葛文 / 王斯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 / 喙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 / 本彼頭腹智干支斯彼暮斯智干 / 支此七王等公論敎用

 

계미년 9월 25일, 사탁의 지도로 갈문왕, 사덕지 아간지, 자숙지 거벌간지와 탁의 이부지 일간지, 지심지 거벌간지와 본피의 두복지 간지와 사피의 모사지 간지, 이 7왕들이 함께 의논하여 교시하였으니......(이하 생략)

 

<영일 냉수리 신라비>

 

▲전법흥왕릉

  

▲전법흥왕릉

 

▲전법흥왕릉

 

   1985년에 포항 냉수리에서 발견된 고신라비의 일부분이다. 503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냉수리신라비에는 7명의 왕이 화백회의를 통하여 국가의 어떤 일을 결정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때에도 7명의 왕은 칭호가 왕이 아닌 ○○간지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공식적으로 왕이란 칭호를 사용한다. 즉위 당시 법흥왕은 마립간이었다. 울진 봉평비에 의하면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이라는 분명하게 씌여 있다. 여기서 매금왕이 마립간을 가리킴은 물론이다.

 

▲전법흥왕릉

 

▲전법흥왕릉

 

▲전법흥왕릉

 

   법흥왕은 6세기 전반의 인물이다. 따라서 왕릉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고분인 천마총과 비슷한 규모이어야 한다. 천마총이 14m 정도의 높이인데 비하여 전법흥왕릉은 4.5m 정도에 불과하다. 봉분의 크기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줄어드는 일은 없다. 17세기 후반에 족보를 제작하기 시작한 경주김씨와 경주박씨 문중에서는 왕릉 찾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 경주박씨 문중에서는 오릉을 시조인 혁거세릉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문중묘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장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경우까지 남산서록의 고분들을 모두 박씨 왕릉으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는 능만을 찾아서 지정하였다. 이때 절터를 기준으로 왕릉을 찾기 시작했으며 마침 효현동 외외마을에 신라말기의 탑이 있었고 동경잡기에 애공사라 하였고 아래 들판을 애공량이라고 한 점을 들어 그 서쪽에 있는 현재의 고분을 법흥왕릉으로 지정하였던 것이다. 전법흥왕릉은 결코 법흥왕릉일 수 없고 다만 신라 말기 어느 왕의 능일 수는 있으나 거기에 적합한 왕이 없는 실정이다.

 

 

 

<2008.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