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금척리 고분군(金尺里古墳群)
금척리 고분군은 경주에서 영천으로 통하는 국도변 양쪽으로 30여기의 대소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이 고분군은 일제 때 52기에 달했으나 현재 32∼3기 정도가 남아있다. 모두 적석목곽분이다. 그러나 시내에 위치한 적석목곽분에 비해 규모가 작고 유물이 화려하지 않다. 이것은 시내의 적석목곽분 세력에 비해 한 단계 낮은 집단의 무덤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이 고분이 금척리라는 지명을 얻게 된 데에는 금척(金尺)을 묻었다는 동경잡기에 전해오는 전설 때문이다.
신라가 건국되고 혁거세거서간이 임금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 날 어린 임금이 대궐의 뜰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저는 하늘의 사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새로운 나라를 축하하기 위해서 이 금척을 선물로 갖다 드려라 하므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 금자는 앓는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다시 살아나는 보물입니다. 잘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사라졌다.
임금은 하늘에 절하고 금자를 받아들이고 신하들에게 설명한 다음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왕비는 어질게 백성을 다스렸으므로 나라안이 화목하고 농사도 잘 되어 태평세월이 계속되었다. 임금도 백성들도 하늘이 축복해준 금자의 덕인 줄로 알고 금자를 소중히 여겼다.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한나라 왕이 신라에 금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잠깐 보고 줄 테니 빌려 달라고 사신을 보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린 임금은 신하들을 불러 "금자를 빌려주는 것이 좋겠는가 안 빌려주는 것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한 신하가 나와서 말했다.
"한나라는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교만한 나라입니다. 금자를 비려주면 우리 신라를 업신여겨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신하가 말했다.
"한나라는 자기네 나라가 부강한 것을 믿고 이웃 작은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만일에 보물을 한나라가 갖고 있다면 이웃 작은 나라들을 더욱 괴롭힐 것입니다. 금자를 보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중한 보물이라도 잠깐만 보고 주겠다는 데 그것도 못한다면 어찌 이웃간의 의리가 되겠소. 못 주겠다는 구실이 분명해야지 않겠소."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그 금자를 땅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한도가 있는 것인데 죽어야 할 사람을 그러한 보물로서 자꾸만 살려 놓는다면 마지막에는 나라안에 인구가 차고 넘어 새로 세상에 태어날 자손들이 크게 위협받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보물을 가짐으로서 공연히 강한 나라의 욕심을 자극하여 침략을 받을 염려도 없지 않으니 땅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상책인가 합니다."
박혁거세는 그 의견을 옳게 여겨 그 금가를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신하들은 다시 임금에게 말했다.
"한나라는 넓고 큰 나라입니다. 만일 금자를 땅에 묻었다는 기미를 알게 되면 곧 파내어 가지고 갈 것입니다. 금자무덤 주위에 더 많은 무덤을 만들어서 어느 무덤 속에 금자가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표형분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혁거세가 이를 허락했다. 그 후 한나라 사신이 와서 금자를 빌려달라고 했다. 왕은 "이웃 나라에서 금자를 잠깐 빌려 달라 하시니 어찌 못한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금자가 너무 귀중한 보물이라서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래도 도적들이 훔쳐갈까 두려워서 그 주위에 더 많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자를 묻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금자가 어느 무덤에 들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렵게 먼길 오셨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금자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나라 사신은 있는 무덤을 모두 파보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하며 금자를 묻은 무덤으로 안내를 하라 하였다. 금자를 묻은 무덤이 너무 많은 까닭에 파보는 것을 단념하고 한나라의 사신은 돌아갔다. 그 후 무덤 속에 금자를 묻은 사람이 정말 죽었으므로 신라에서도 금자가 들어있는 무덤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도 금자는 금척리 고분군중 어느 무덤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동경잡기 이문 금척원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미천한 인물이 꿈을 통해 금으로 된 자를 얻음으로써 영예로운 지위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로 문헌과 구전자료가 풍부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성계의 조선창업을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척설화가 인용되기도 한다. 특히 문헌설화가 그러한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에 꿈에 신인이 내려와 "그대의 자질은 문무를 겸비했으며 덕망과 식견이 있어 백성이 촉망한지 오래되었으니 이 자를 가지고 다스리라." 하며 금척을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 금척설화는 태조실록, 양촌집, 삼봉집, 용비어천가, 대동운부군옥, 목재집 등에 거듭 나타나며 금척은 신성한 왕권의 상징물로 인식되고 있다.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구전설화는 하층농민의 영달을 그린 민담적 구성을 이루며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구전설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조실부모하고 고생하며 자라난 어떤 머슴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자랑만 하고 내용에 관한 이야기도, 일도 하지 않자 화가 난 주인이 관가에 고발했다. 결국 상급관리들을 거친 후 임금 앞에 가서도 꿈의 꿈의 내용을 말하지 않으므로 화가 난 임금이 투옥시켜 머슴은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 머슴은 우연히 감옥 안에 들락거리는 쥐를 죽이게 되었는데, 다른 쥐가 자 같은 것을 물어와서 죽은 쥐의 가로 세로를 재니까 죽었던 쥐가 되살아 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았았다. 마침 임금의 딸이 북을병에 걸려서 백약이 무효라는 소문을 듣고 자청하여 그 자로 공주를 살렸으므로 부마가 되었다. 중국의 천자가 그 소식을 듣고는 자기의 딸로 살려주기를 청했으므로 역시 살려준 뒤, 그 머슴은 두 나라의 부마가 되었다. 머슴은 두 부인의 시중을 받으면서 비로소 자기가 꿈꾸던 꿈의 내용을 이야기 하였다는 설화이다.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은 서북쪽과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규모나 밀집도 면에서 점점 약해지고 있다. 북쪽과 서쪽의 고분들은 모두 대형분에 속하지만 동남편에 위치한 고분군은 중형급이며 밀집도도 현저히 덜어진다. 동일 고분군내에서 대형고분의 존재는 모량부 내에서도 신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 국도 4호선 서편의 고분군과 동편의 1호분~16호분까지는 대형분에 속하는데 이들은 이른 시기의 것이며 동남의 소형고분들은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금척리 고분군은 불교가 전래되는 중고기 단계에 와서는 방내리 고분군이 있는 말암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평지에서 산지로 이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조영된 것으로 보이는 산정의 고분은 적석목곽분이다. 즉, 정상부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횡혈식석실분으로 묘제가 변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당시 어떤 특정한 사상적 배경아래 고분의 입지를 평지에서 산지로 옮겼을 뿐 묘제는 그대로 적석목곽분에서 횡혈식석실분으로 동시에 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의 주인공들은 건천읍을 중심으로 하는 평야지대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으며 고분군의 규모와 집단성으로 보아 당시 경주분지의 지배자인 마립간과 거의 대등한 힘을 소유한 것으로 보이며 왕비를 배출하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지증왕 이후 박씨들이 왕비로 등장하는 것을 문헌사료를 통하여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금척리 고분군
<200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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