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남평문씨 세거지 - 죽헌종택
고가인 경우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같은 집인데도 훈기가 돌고 윤기가 흘러 집이 돋보인다. 반대로 아무리 가치 있는 훌륭한 집이라도 그곳에 사람의 손길이 끊어지면 찬바람이 휘감기고 허망함이 배어나와 집의 품격이 떨어지고 수명도 줄어든다. 인흥마을은 이런 의미에서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는 옛집들이 모여 있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인흥마을이라고도 부르는 남평 문씨 세거지는 조선 말기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약 100년간에 걸쳐 형성된 최소 규모의 씨족 마을로,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높은 벼슬이나 권력에 힘입어 이루어진 마을이 아니라, 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보기 드물게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주택사업을 벌여나갔기 때문에, 요즘 계획적으로 세운 일산과 고양과 같은 신도시에 온 듯한 인상을 준다. 전통 한옥 9채와 재실 2채를 포함해서 모두 11채가 있는 데, 마치 우물 정(井)자처럼 가로세로 줄을 맞추어 네모 반듯하게 구획을 나누고, 길을 닦고 집을 지었다. 마을 골목길은 곧게 뻗어있으며, 다른 마을에 비해서 골목의 폭이 넓은 편이다. 흙내 가득한 흙담길을 따라 인흥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치 고향을 찾은 듯이 푸근해진다.
남평 문씨는 원래 전라도 나주시 남평면에서 출발하였으며, 고려말에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붓 대롱 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들어 와서 이 땅에 의류 혁명을 일으킨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 선생의 후손들이다. 이 마을은 문익점의 18세손 인산재 문경호(仁山齋 文敬鎬, 1812년-1923년)가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1834년에 지금의 광거당 터에 용호재라는 재실을 지은 것이 그 출발이다. 그 후 1940년대에 거의 지금과 같은 아홉 채의 한옥과 2채의 재실을 갖춘 마을을 이루었다. 이때 남평 문씨들은 50만 평의 토지와 만석꾼에 가까운 막강한 부를 쌓아올렸고, 그 경제력 바탕 위에 일만 평 대지 위에 고래등과 같은 기와집을 지었다.
▲남평문씨 세거지
▲남평문씨 세거지
▲남평문씨 세거지
▲남평문씨 세거지
▲남평문씨 세거지
▲죽헌종택
▲죽헌종택
▲죽헌종택
▲죽헌종택
▲죽헌종택
▲죽헌종택
▲죽헌종택 쪽문
▲죽헌종택
▲죽헌종택 고려정
▲죽헌종택 고려정
<2008.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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