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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인흥사터(仁興寺址)

蔥叟 2008. 10. 18. 08:15

달성 인흥사터(仁興寺址)

 

   인흥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었던 절로서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다. 원래 이름은 인홍사(仁弘寺)이다. 1264년(원종 5) 오어사(吾魚寺)에 있던 일연(一然)이 옮겨와서 주지가 되었고, 1275년(충렬왕 1) 이 절을 중창한 뒤 인흥사로 개칭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친필의 액(額)을 내리기도 하였다. 남평 문씨 세거지를 인흥마을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전에 이곳에 인흥사(仁興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흥마을은 옛 절터에 자리잡고 있다. 인흥사는 삼국유사를 쓴 보각 국사 일연 스님이 11년간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歷代年表)와 불경까지 편찬한 이름 높은 절이었다.

 

▲인흥사터 발굴현장

 

▲인흥사터 삼층석탑

 

▲인흥사터 삼층석탑

 

   삼국유사 연표의 저본이 된 것으로 보이는 ‘역대연표’는 합천 해인사에 목판으로 보관되어 있는 고려각판 중의 하나로, 모두 2판으로 되어있다. 역대연표가 간행된 것은 일연이 인흥사를 떠난 후인 1278년이고 명확히 간행자가 일연이라는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남해시절에 대장경판각을 하면서 출판에 대한 중요성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출판에 대한 노하우를 터득한 일연이 아니었던가. 또한 남해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판각 기술자들도 인흥사로 불러 삼국시대의 연표를 완성하고 출판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일왕조가 아닌 삼국이 정립하고 있었던 우리 고대사에서 연표를 작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대연표는 그대로 삼국유사 첫째권인 왕력의 저본이 되었음을 생각할 때 바로 인흥사에서 삼국유사의 저술이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인흥사터 삼층석탑 지붕돌 

 

▲인흥사터 삼층석탑 몸돌 문비

 

▲인흥사터 삼층석탑 몸돌 문비

 

   또한, 고려 공민왕이 쓴 현판도 있었다고 하며, 고려 말에는 이숭인(李崇仁)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탑재(塔材)들과 조산(造山)·주춧돌·돌유구 등이 있는데, 이 유물로 보건대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기에 창건되었고,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몇 차례의 중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에서 간행된 경전으로는 1278년(충렬왕 4)에 간행한 ≪불설장수멸죄다라니경 佛說長壽滅罪陀羅尼經≫과 1293년에 간행한 ≪대비심다라니계청 大悲心陀羅尼啓請≫이 전하여지고 있다.

 

▲고려정

 

▲인흥사터 삼층석탑(경북대학교)

 

▲인흥사터 삼층석탑 몸돌 안상

 

   인흥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에 빈터로 남게 되었는데, 이 빈 절터가 지금과 같은 집터로 바뀌었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돌무더기 탑과 무너진 석탑의 잔해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옛 절터였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의 수봉정사의 자리가 대웅전터로 알려져 있고 종가집 안에 있는 우물 이름을 고려정(高麗井)라고 하는데, 당시 절에서 사용하였던 우물이라고 한다. 인흥사에 있던 삼층석탑 2기 가운데 1기는 경북대학교 노천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1기는 수봉정사 앞 대추나무 밭에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인흥사터에 남아있는 탑과 경대로 옮겨진 탑의 규모가 확연히 달라 쌍탑의 짝이라 보기는 어렵다. 양식 또한 옮겨진 탑은 신라시대 탑이고 절터에 남아있는 탑은 고려시대 탑이다. 또한 남아있는 탑 옆에 복원되지 않은 지붕돌 하나가 있는데 크기가 복원된 탑의 그것과 같다. 따라서 인흥사터에는 원래 신라탑 한 기와 고려탑 2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라탑은 창건 당시의 것이고 고려탑은 일연에 의해 중창될 당시의 것으로 여겨진다. 

 

 

 

<2008.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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