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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 비슬산 도성암(道成庵)

蔥叟 2008. 10. 17. 08:03

달성 비슬산 도성암(道成庵)

 

   유가사(瑜伽寺) 부도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부속암자이며, 경상북도 3대 참선수도처 중의 하나로 알려진 도성암에 이른다. 신라 827년(흥덕왕 2)에 도성(道成)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성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남쪽 고개에 있는 관기(觀機)와 교유하였으며, 평소에는 뒤편 바위 위에서 좌선하였는데, 하루는 바위 사이로 빠져 공중으로 날아가서 행방을 감추었다 한다. 그 뒤 982년(성종 1) 성범(成梵)이 중창하고 만일미타도량(萬日彌陀道場)을 개설하여 50여 년간을 계속하였는데, 여러가지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이 지방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결사(結社)하여 향나무를 채취한 뒤 절에 바쳤는데,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과 같은 빛을 발하였다고 한다.

 

▲도성암(道成庵)

 

▲도성암(道成庵)

 

▲도성암(道成庵)

 

   절 뒷산에는 가섭불(迦葉佛) 때 부처님의 부탁을 받고 이 산중에서 1,000인의 출세를 기다리는 산신 정성천왕(靜聖天王)이 상주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 초기 이후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예로부터 ‘천인득도지(千人得道地)’로 부를 만큼 이름난 참선도량으로 알려진 이 암자는 1963년 무렵에 지금의 대웅전 앞에 선방을 지으면서부터 선풍(禪風)을 드날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증축불사를 시작하여 선원(禪院) 등을 신축하였고, 현재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218㎝의 도성암 삼층석탑이 있다. 또한, 암자 서쪽편 산 위에는 도성이 수도하여 도를 통하였다는 도통바위(道通巖)가 있다.  

 

▲도통바위

 

▲도통바위

 

▲도성암에서 본 비슬산

 

   일연의 삼국유사에 도성과 관기의 득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때에 관기와 도성이란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수는 없다. 둘이 함께 포산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북쪽 굴에서 살았다. 서로 10여리쯤의 거리였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서로 늘 왕래하였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산 속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 굽혀 영접하는  것 같았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나무가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이 관기에게 오게 되었다. 이처럼 지내기를 몇 해, 항상 그렇듯 도성은 그가 거주하는 뒷산의 높은 바위에 좌선하고 있었다.

 

   하루는 바위 사이로부터 몸을 빼어 나와 몸을 허공에 날리며 떠나갔는데 간 곳은 알  수가 없었다. 혹자는 수창군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자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두 성사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살던 곳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도성암에서 본 조화봉

 

▲도성암 삼층석탑

 

▲도성암 삼층석탑 

 

   태평흥국 7년 임오(982)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그는 만일 미타도량을 열어 부지런히 50여년을 전념했는데 특이한 상서가 여러번 있었다. 이 때 현풍의 신도 20여명이 결사(結社)하여 해마다 향나무를 주워다 절에 바쳤다. 산에 가서 향나무를 주워다 절에 바쳤다. 산에 가서 향나무를 채취하다가 쪼개고 씻어서 발 위에 펼쳐두면 그 향나무가 밤이 되면 촛불처럼 빛을 발했다. 그러자 고을 사람들은  그 향나무에게 보시하고 빛을 얻는 해라고 하며 축하했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이거나 산신의 도움 같았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이로 일찍이 가섭불 때에 부처님의 부탁 을 받았는데 그 본서에 말하기를, '산 속에서 1천명의 출세를 기다려 남은 과보를 받겠습니다.' 라고 했다.

 

   산속에서 일찍이 9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은 관기,도성,반사,첩사,도의,자양,성범,금물녀,백우사들이다.  

 

   기리어 읊는다.


        달빛를 밟고 서로 찾아 운천(雲泉)을 희롱하던,

        두 노인의 풍류 몇 백 년이 되었는고,

        연하(烟霞) 가득한 구렁 고목만 무성한데.

        찬 그림자 어긋버긋 서로 맞는 모양일레.


   반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고 하며, 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 말로는 떡갈나무라 한다.

 

▲도성암 삼층석탑

 

▲도성암 삼층석탑

 

▲도성암 부도밭

  

    이 두 성사 반사,첩사는 오랫동안 산골에 숨어서 지내므로 인간 세상과는 사귀지 않았다.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을 대신하여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고 하체를 가릴 뿐이었다. 그러므로 반사,첩사로 호를 삼았던 것이다. 듣자니 일찍이 풍악에도  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옛날의 은자들의 세속을 떠난 운치가 이와 같음이 많으나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에 우거할 때에 두 스님의 미덕을 기린 글 한 수를 쓴 일이 있는데, 이것을 아울러 여기 적는다.


        자모와 황정으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나뭇잎, 누에 쳐 짜낸 베가 아닐세.

        찬바람 쌩쌩 불고 돌은 험한데, 해저문 숲 속으로 나무해 돌아오네.

        밤깊어 달 밝은데 그 아래 앉으면, 반신은 바람따라 삽연히 나는 듯.

        떨어진 포단에 자노라면, 속세엔 꿈 속에도 아니 가네라.

        운유는 가버리고 두 암자는 폐허인데, 인적 드문 산 사슴만 뛰노누나. 

 

삼국유사 <포산 2성(包山 二聖)조>

 

▲도성암 만엽송

 

 

 

<2008.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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