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 - ④건원릉(健元陵)
건원릉은 동구릉 내 9개 능 중 하나로,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능이다. 태종 8년(1408년)에 조영된 건원릉은 기본적으로 고려 왕릉 중 가장 화려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양식을 따랐다.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와 장명 등의 조형에서 몇 가지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봉분 주위에 곡장을 두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서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반영하고 있다.
▲건원릉
▲홍살문
이와 같은 건원릉의 양식은 이후 조선 왕릉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건원릉에는 특이하게 봉분에 갈대가 입혀져 있는데, 이것은 이성계가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갈대로 자신의 봉분을 덮어달라고 유언한 것을 태종이 따랐기 때문이다. 이 외에 태조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도 볼 수 있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조선조의 신도비는 건원릉의 태조 신도비와 헌릉의 태종 신도비, 2개뿐이다.
▲수복방
▲정자각
1408년 5월 24일 74세를 일기로 승하하여 그 해 9월 9일 건원릉에 묻혔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이고 묘호는 태조이다. 왕릉 들머리에 재실(齋室)이 있다. 능에 딸린 이부속 건물은 왕릉의 수호관리를 담당하던 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관이 휴식을 취하고, 제기를 간수하며, 수복의 거처로 쓰였던 건물이다.
▲비각
▲정자각과 능침
재실을 지나 왕릉으로 들어가는 금천교를 만난다. 금천교란 이름은 침범을 금한다는 뜻인데 금천교 건너편이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표현한 것이다. 금천교를 건너면 홍살문이 서있다. 잡귀를 막고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붉은색과 화살모양으로 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길이 이어져 있다. 바로 참도(參道)이다. 그런데 잘 보면 길은 두 줄로 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작은 돌 판이 있다. 돌 판은 판위 또는 배위로 불리는 것으로 왕릉에 왔음을 알리고 네 번 절을 하는 곳이다. 두 길은 각각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로 신(神)과 임금이 지나는 길임을 알려 준다.
▲정자각과 능침
▲능침에서 본 정자각과 비각
이 길을 따라 가면 정자각에 이른다. 정자각이란 말은 건물이 한자의 정(丁)자 모양으로 생겼다고 붙은 이름으로 제물을 올리는 곳이다. 정자각에는 동서쪽으로 돌계단이 있는데 동쪽에는 2개 서쪽에는 1개이다. 동쪽으로 선왕의 혼령과 함께 온 왕이 들어와 선왕의 혼령은 능으로 들어가고 왕은 서쪽 계단을 통해서 내려온다. 즉 東入西出이다. 정자각 동서 양쪽에는 수복방과 수라간이 있다. 정자각의 동쪽의 비각에는 왕릉의 묘비가 있다. 또 정자각 뒤에 보면 신이 내려오는 다리란 뜻으로 신교가 있다.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놓칠 정도로 작다. 근처에는 제향 후 축문을 불에태워 담는 돌 상자인 예감도 있다. 여기까지가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공간이라면 봉분 위는 죽은 왕을 위한 공간이다.
▲소전대(燒錢臺)
▲사초지
작은 언덕처럼 되어 있는 사초지 위에 봉분이 있다. 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작아 보이지만 각종 장식물이 있어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봉분 앞에는 초계, 중계, 상계가 있는데 초계에는 무인석 1쌍과 석마가 있고, 중계에는 혼령을 위로하는 장명등과 문인석 한쌍이 있다. 이 문무인석은 임금의 명을 받들고 있다. 그 옆에는 문인과 무인이 탈 말이 대기하고 있다. 문인이 무인보다 높은 곳에 있어 조선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봉분
▲상석
또 망주석도 있다. 세호라고 하는 동물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호랑이지만 토실토실한 꼬리 때문에 다람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또 어떤 이는 도롱뇽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선왕의 혼령이 나와 쉬는 곳이며 정자각에서 제사를 지낼 때 나와앉아서 제사를 받는 곳인 혼유석 또는 상석이 있다. 혼유석을 아래에서 받치는 돌을 고석(鼓石)이라 하는데 귀면문이 새겨져 있다. 고석은 태조의 건원릉에서 5개, 세종의 영릉에는 4개로 줄었다가 휘릉에서 다시 5개로 늘어났다.
▲고석의 귀면
▲문인석
봉분 양 옆으로 석양과 석호가 무덤을 지키고 있다. 석양은 사악함을 물리치고 명복을 비는 의미이고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을 의미한다. 봉분은 병풍석으로 둘러져 있는데 병풍석은 면석과 난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 12면인데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난간석 또한 12칸인데 석주와 죽석 그리고 동자석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뒤로 동서북 3면으로 담장이 보호하듯이 둘러쳐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곡장이다.
▲문인석
▲무인석
한양에서 동구릉으로 가는 길에 망우고개라는 곳을 지나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닦은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을 물색하게 했는데, 양주 검암산(지금의 동구릉)의 건원릉 자리에 신후지지(身後之地, 생전에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 올라 멀리 자신이 묻힐 능 자리를 굽어보면서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고개를 '망우(忘憂)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장명등
▲곡장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한갓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태조가 원래 묻히고자 한 곳은 자신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정릉에 합장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강비와의 사이가 나빴던 태종 이방원은 의정부에서 정릉이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논란이 있자 정릉 100보(180m) 밖까지 주택지로 허가햇고 세도가들은 앞다투어 숲을 베어내고 저택들을 지었고 정릉주변은 초토화 되었다.이를 본 태조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408년 태조는 승하하자 이방원은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은 따로 한양 가까운 곳의 길지를 찾던 중 좌의정 하륜의 천거로 이곳을 능지로 정했던 것이다.
▲곡장
<2008.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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