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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 - ①수릉(壽陵)

蔥叟 2008. 1. 28. 07:41

구리 동구릉 - ①수릉(壽陵)

 

   동구릉(東九陵)은 도성의 동쪽에 있는 아홉기의 능이란 의미를 지닌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이곳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모두 9기의 능에 17위의 왕과 왕비의 유택에 마련되어 있다. 1408년 5월에 태조가 승하하자 한양과 가까운 파주, 고양 등지에서 능자리를 찾던 중 좌의정 하륜의 천거로 이곳이 능지로 정해져 그해 9월에 건원릉이 조영되었고 그후 차례로 능이 들어서 문조의 수릉이 들어섬으로서 마침내 동구릉이 완성되었다.

  

▲동구릉 홍살문

 

▲수릉 홍살문

 

   수릉(壽陵)은 조선 제23대 순조의 세자(효명세자)이자 제24대 헌종의 아버지인 문조와 신정익황후의 능이다. 효명세자는 순원숙황후의 소생으로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순조 12년(1812)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연동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는다.  

▲수릉 정자각과 능침

 

▲수릉 정자각과 비각

 

   효명세자가 죽자 처음 동구릉의 의릉(懿陵, 경종릉)의 왼쪽에 안장하고 연경(延慶 또는 延景)으로 묘호를 삼았다. 아들인 철종이 즉위하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수릉(綏陵)으로 승격하였으나 헌종 12년(1846)에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 아래로 옮겼다가 다시 철종 6년(1855)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건원릉(健元陵, 태조릉) 왼쪽으로 옮겼다. 1890년 신정왕후가 죽자 이곳에 합장하였고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수릉 능침

 

▲수릉 난간석

 

   문조의 비 신정익황후는 문조가 22세에 요절한 것과는 달리 83세가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의 정국을 주물렀다. 신정익황후 조씨는 1834년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올라 죽은 남편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고, 1857년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도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전부터 흥선군 이하응(대원군)과 조타인 조성하와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흥선군으 둘째 아들 고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혼유석의 고석 귀면 

 

▲장명등

 

   수릉은 합장릉이기 때문에 봉분과 혼유석을 하나씩만 마련해 놓아 겉보기에는 단릉처럼 보인다. 초계 아래에 중계와 하계를 하나로 합쳐 문인석과 무인석이 한단에 세워져 있다. 능역 안에는 곡장 3면, 난간석 12칸, 석약과 석호 각 2쌍, 혼유석 1, 망주석 1쌍, 장명등 1, 문인석 1상과 석마 1쌍, 무인석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과 홍살문 그리고 비각이 있다.

 

▲무인석과 문인석 

 

▲문인석과 무인석

 

   정자각 동쪽에 있는 비각 안에는 신비와 구비가 세워져 있다. 구비에는 '조선국 익종대왕 수릉 신정왕후 부좌(朝鮮國翼宗大王壽陵 神貞王后 부左)'라는 전서체의 고종 어필이 새겨져 있고, 신비에는 '대한 문조익황제 수릉 신정익황후 부좌(大韓文祖翼皇帝壽陵 神貞翼皇后부左)'라고 새겨져 있다.

 

▲석양과 석호 

 

▲곡장

 

 

 

<2008.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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