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척화비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자국(自國) 선교사의 처벌 등을 문제 삼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 중국이 겪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고,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교역을 허락한다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굳세게 싸울 것과 그들의 문호개방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병인양요에서 표출되었던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한층 더 강화되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것이 척화비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전면에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라는 내용이 좌측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높이 123cm, 폭 46cm, 두께 20cm이다. 원래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을 광복 후 만옥정(萬玉亭) 공원으로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창녕 척화비
*창녕 척화비
<2007.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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