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교동 고분군
창녕읍 북쪽 교동의 창녕박물관 일대에 무리지어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다. 창녕에서 밀양으로 가는 24번 국도에 의해 동서의 2군(群)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쪽의 70여 기를 A군으로, 동쪽 80여기를 B군으로, B군 남쪽의 송현동 고분군을 C군으로 나누기도 한다. 일제시대에 송현동고분군의 일부와 함께 10여기 정도가 발굴되었는데 출토유물이 마차 20대와 화차 2량에 싣고도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1992년 2월부터 6월까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B군의 1~5호분을 발굴조사했다.도굴의 피해가 심헤 만족스런 성과는 아니었으나, 교동고분군의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에 밝혀진 약간의 내용과 아울러 확인된 고분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분의 돌방(石室)은 세 벽을 쌓고 한 쪽 짧은 벽을 입구로 매장했던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대부분이다. 둘째 봉토 언저리에 호석(護石)이 돌아가는 것이 많고, 호석 밖으로 나무기둥을 세워
봉토를 방사선식으로 구분하여 다졌다.. 셋째, 5~6세기 경에 축조된 무덤이 고분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 A군 최대의 7호분은 5세기 중엽 경으로 생각되는데, 출(出)자형금동관, 은제띠고리, 청동그릇 등이 출토되어 신라적 색채를 나타내고 있다. 가야세력이 신라에 편입되어 가는 모습을 짐작케한다. 다섯째, A군의 11호분에서는 금으로 글을 새긴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이 출토되었다. 신라를 통한 고구려와의 교류를 짐작케 하는 내용으로 해석되고 있다. 교동고분군은 비화가야(非火伽椰, 非自國)왕들의 묘역으로, 비화(非火)는 '빛들 - 빛이 좋은 들'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호석을 두른 고분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호석이 여러단인 고분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표형분도 보인다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교동 고분군
<2007.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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