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탑금당치성문기비(塔金堂治成文記碑)
9세기 초 통일신라시대의 절의 건립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비석이다. 비에 새겨진 글에는 인양사(仁陽寺) 등 여러 사찰의 범종, 탑, 불상, 금당, 요사 등의 조성연대와 이에 소요되었던 양식 등이 담겨있다. 인양사 종을 주조한 771년에서 이 비석이 세워진 810년까지의 40년 간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탑금당 치성문기비(塔金堂治成文記碑) 비각
비석 뒷면에는 승려의 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이 비석에 담긴 일과 관련된 고승을 기려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된 상은 어린 얼굴에 자비로운 모습인데, 인체를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비석 위에는 이례적으로 지붕과 같은 머릿돌이 얹혀있는데, 크기가 비신에 비해 지나치게 커 원래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비의 높이는 150cm, 폭은 45cm이다.
*탑금당 치성문기비(塔金堂治成文記碑)
*승려상
*승려상 몸체
*승려상 하체
종래에는 이 치성문의 판독이 부정확하여 제1행에 나오는 ‘□塔 金堂治成文記之’의 부분이 ‘阿飡金□□願文記之’로 읽혀졌는데(『朝鮮金石總覽』), 그 결과 사찰에 많은 양의 곡식을 시주한 인물의 공덕비로 생각되어 사원 경제에 관한 자료로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판독의 결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비의 앞면에 있는 승려의 상과 관련하여 측면의 기록은 이 승려의 공을 칭송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이 승려가 인양사 금당의 건립에 공이 큰 승려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좌측면의 기록에 대한 판독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비문
뒷면의 치성문에서는 혜공왕(惠恭王) 7년(771)에서 헌덕왕(憲德王) 2년(810)에 이르는 근 40년간에 걸친 인양사의 탑과 금당 등을 건립, 보수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조달이 구체적으로 적혀있어서 당시의 사원 운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측면에는 여러 불교전설 혹은 승려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고행의 여러 모습을 적고 있고, 특히 초기 중국 선종(禪宗)에 관한 내용도 있어 당시 신라 불교의 수행관과 신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문
(뒷 면)
元和五年庚寅六月三日順表□塔金堂治成文記之辛亥年仁陽寺
鍾成辛酉年六寺安居食六百六石壬戌年仁陽寺事妙戶頂?石成
同寺金堂治同年羊熱楡川二?施食百二石乙丑年仁陽无上舍成
壬午年京奉德寺永興寺天巖寺寶藏寺施食二千七百十三石壬午
年仁陽寺三寶中入食九百五十四石同年塔盧半治癸未年仁陽寺金
堂內成同年苑池寺金堂內成癸未年仁陽寺塔弔四層治同年
仁陽寺佛門四角鐸成乙酉年仁陽寺金堂成開□堂盖丁亥年須彌
成己丑年常樂寺无?倉成庚寅年同寺无□倉成同年大谷寺石塔
成己丑年仁陽寺赤戶階成寺戶石梯頂二石成□鶴足石成庚寅
年龍頭成辛亥年初庚寅年至間□合用食一萬五千五百九十五石
(우 측)
夫大要多語求之□等□□□門八萬(下缺)
有木食巖居草□石□(下缺)
(좌 측)
依三寶奉報四恩復有偏身獻佛役力供僧栖廻谷宴黙深山
雪中截臂?下通心怜鳩割股念佛投身如此等類皆是菩提
*비문
元和 5년(810), 경인(庚寅)년 6월 3일에 순표□탑(順表□塔)과 금당(金堂)을 수리하고(治), 완성한(成) 글을 기록한다.
신해(辛亥)년(771)에 인양사(仁陽寺)의 종이 완성되었다. 신유(辛酉)년(781)에 여섯 절에서 안거(安居)할 때 6백 6석의 곡식을 먹었다. 임술년(782)에 인양사의 사료(事妙)(抄?)호(戶)와 정례석(頂禮石)(拜禮石)이 완성되었다. 같은 절의 금당(金堂)을 수리하였다. 같은 해에 양열(羊熱)과 유천(楡川)의 두 역(驛)에서 곡식 1백 2석을 시납하였다. 을축(乙丑)년(785)에 인양사의 무상사(无上舍)가 완성되었다. 임오(壬午)년(802)에 서울(경주)의 동덕사(奉德寺)와 영흥사(永興寺), 천암사(天巖寺), 보장사(寶藏寺) 등에서 곡식 2천 7백 13석을 시납하였다. 임오년에 인양사의 삼보(三寶)에 9백 54석의 곡식을 넣었다. 같은 해에 탑의 노반(露盤)을 수리하였다(塔盧(?)를 반절 수리하였다). 계미(癸未)년(803년)에 인양사 금당 안의 (불)상을 완성하였다. 같은 해에 원지사(苑池寺) 금당 안의 (불)상을 완성하였다. 계미년에 인양사의 탑이 4층이 무너져서 수리하였다. 같은 해에 인양사 佛門(불문) 네 모서리의 풍경이 완성되었다. 을유(乙酉)년(805)에 인양사 금당이 완성되었다. 개□당(開□堂)에 지붕(을 올렸다?). 정해(丁亥)년(807)에 수미단(須彌壇)이 완성되었다. 기축(己丑)년(809년)에 상락사(常樂寺)의 무진(無盡)(?)倉이 완성되었다. 경인(庚寅)년(810년)에 같은 절의 무□창(無□倉)(舍?)이 완성되었다. 같은 해에 대곡사(大谷寺)의 석탑이 완성되었다. 기축년에 인양사 적호(赤戶)의 계단이 완성되었다. 절문의 돌계단과 정례석 둘이 완성되었다. □학족석(□鶴足石)이 완성되었다. 경인년에 용두(龍頭)가 완성되었다.
신해년에 시작하여 경인년에 마치기까지 그 사이에 모두 곡식 1만 5천 5백 9십 5석을 사용하였다.
*비문
<우측면>
무릇 큰 요례(要體)는 많은 말로써 구한다. (결락) 문(門)이 8만 (결락)
나무 껍질을 먹으며 바위에서 고행하며, 풀로 옷을 해입고 돌 속에 사는 (결락)
<좌측면>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사은(四恩)에 보답하는 방법들이 있다. 또한 온 몸을 부처에게 바치고, 힘써 노력하여 승려들을 공양하고, 깊은 계곡에서 마음을 편안히 하며 지내고, 깊은 산 속에서 말없이 지내고, 눈 속에서 팔을 자르고, 방아 찧다가 마음을 깨닫고, 새를 불쌍히 여겨 무릎의 살을 베어주기도 하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것들 모두가 보리(菩提)를 구하는 방법인 것이다.
<2007.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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