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낙남문화권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眞興王拓境碑)

蔥叟 2007. 5. 9. 04:46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眞興王拓境碑)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년 2월 1일 입(辛巳年 二月 一日 立)"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3개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 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개석(蓋石)이 없고 인명(人名)과 관등(官等)의 표기 방식이 독특하며 고졸한 해서체 등을 지녀 신라  비석 중 가장 오랜 형식을 보여준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여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 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부분은 관련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재개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줄은 3자이다. 

 

*진흥왕 척경비(眞興王拓境碑) 비각

   

   이 비는 원래 창녕읍 동쪽에 우뚝 솟은 화왕산(火旺山)에서 뻗어내린 목마산(牧馬山)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1914년 조거용장(鳥居龍藏)이 이 지방의 고적을 조사할 때 보통학교장(普通學校長) 교본량장(橋本良藏)을 통해 고비석(古碑石)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조사 보고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비의 발견경위에 대해서는 今西龍, 1921, 「新羅眞興王巡狩管境碑考」『考古學雜誌』12-1; 1933 『新羅史硏究』참조).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창녕은 본래 비화가야(非火加耶)가 자리한 곳이었으나 진흥왕대(眞興王代)에 신라의 영역이 되어 비자화군(比自火郡)이 설치되었다. 그후 진흥왕 16년(555)에 하주(下州)가 설치되었고, 26년(565)에 주(州)가 폐지되었다가,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와서 화왕군(火旺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 창녕군으로 되었다.

   비의 재료는 단단한 화강암으로 편평한 큰 돌이다. 높이는 가장 높은 부분이 약 300cm이고 가장 낮은 부분이 115.1cm이다. 폭은 가장 넓은 부분이 175.7cm이고, 두께는 30.3cm에서 51.5cm에 이른다. 직선으로 글자를 둘러싸는 선을 그었으나 정연하지는 않다. 덮개돌[蓋石]은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고, 받침돌[趺石]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진흥왕 척경비(眞興王拓境碑) 비각



   비면은 자연석 그대로이나 글자가 새겨진 면은 사방을 파고 약간 갈았다. 글자수를 보면 제1행에서 제16행까지는 매행 26자씩으로 되어 있다. 단 제1행은 9자째와 10자째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24자로 되어 있고, 제3행은 한 글자가 더 새겨져 27자로 되어 있다. 제17행과 제18행은 한 단 낮게 새겨져 행당 25자로 되어 있고, 제19행과 제20행은 2단 낮아져 행당 24자씩 되어 있으며, 제21행과 제22행은 3단 낮아져 행당 23자씩 되어 있다. 그리고 제23행과 제24행은 4단 낮아져 행당 22자로 되어 있고, 제25행과 제26행은 6단 낮아져 행당 20자로 되어 있으며, 제27행은 7단 낮아져 3자만 새겨져 있다.

   비문의 서체는 예서(隷書)와 해서(楷書)의 중간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과 흡사하며, 진흥왕의 여타 순수비보다는 고졸(古拙)하다고 한다.

 

*진흥왕 척경비(眞興王拓境碑)

 

辛巳年二月一日立  寡人幼年承基政委輔弼智  行悉

事末□□立□赦□□□□□四方□改囚□後地土□陝也

古□□□不□□□□□□□□□□□□□□□人普□山□心

除林□□□□□□□□□□□□□□□□此□?□□

而已土地彊時山林□□□□□□□□□也大等?軍主幢主

使?外村主審□故□□□□□□□□□海州白田畓□□?

山□河川□敎以□□□□□□□□□□□□□□□□□□人

 □之雖不□□□□□□□□□□心□□河□□□□于之

其餘少小事知古□□□□□□□者□□以上大等?古奈末典

法□人?上□□□□□□□□□□□□此以□□看其身受

□ 于時□□大□□□□□□智葛文王□□□□者漢只□□

屈?智大一伐干□喙□□智一伐干□□折夫智一尺干□□□

□智一尺干喙□□夫智?干沙喙?力智?干喙小里夫智□□

干沙喙都設智沙尺干沙喙伐夫智一吉干沙喙忽智一□□□

?□次公沙尺干喙?亡智沙尺喙述智沙尺干喙□□□□

沙尺干喙比?□□智沙尺本末□智及尺干喙□□智□□□

 沙喙刀下智及尺干沙喙□□智及尺干喙鳳安智□□□□□

 等喙居七夫智一尺干□一夫智一尺干沙喙甘力智□□干□

  大等喙末?智□尺干沙喙七?智及尺干四方軍主比子伐

  軍主沙喙登□□智沙尺干漢城軍主喙竹夫智沙尺干碑利

   城軍主喙福登智沙尺干甘文軍主沙喙心夫智及尺干

   上州行使大等沙喙宿欣智及尺干喙?叱智奈末下州行

    使大等沙喙春夫智大奈末喙就舜智大舍于抽悉□□

    西阿郡使大等喙北尸智大奈末沙喙須?夫智奈□

       爲人喙德文奈末比子伐停助人喙?薩智大

       奈末書人沙喙導智大舍村主??智述干麻叱

        智述干


 

*진흥왕 척경비(眞興王拓境碑)

 

   신사년(辛巳年) 2월 1일에 세웠다. 과인(寡人)은 어려서 왕위에 올라 정사(政事)를 보필(輔弼)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 일의 끝에 … 사방(四方)으로 … 널리 … 이익(利益)을 취하고 수풀을 제거(除去)하여 … 토지(土地)와 강토(疆土)와 산림(山林)은 … 대등(大等)과 군주(軍主), 당주(幢主), 도사(道使)와 외촌주(外村主)는 살핀다. … 고로 … 해주(海州)의 전답(田畓)□□와 산림과 하천은 … 비록 … 그 나머지 사소한 일들은 … 상대등(上大等)과 고나말전(古奈末典), 법선□인(法選□人)과 상(上) … 이로써 … 몸이 벌을 받는다. 이때 □□대□(□□大□)는 □□□□□지(□□□□□智) 갈문왕(葛文王)이고, □□□□자(□□□□者)는 한지□□(漢只□□)의 굴진지(屈?智) 대일벌간(大一伐干)이고, □탁(□喙)의 □□지 (□□智) 일벌간(一伐干)이고, □□절부지(□□折夫智) 일척간(一尺干)이고, □□□□지(□□□□智) 일척간(一尺干)이고, 탁(喙)의 □□부지(□□夫智) 잡간(?干)이고, 사탁(沙喙)의 무력지(武力智) 잡간(?干)이고, 탁(喙)의 소리부지(小里夫智) □□간(□□干)이고, 사탁(沙喙)의 도설지(都設智)사척간(沙尺干)이고, 사탁(沙喙)의 벌부지(伐夫智) 일길간(一吉干)이고, 사탁(沙喙)의 홀리지(忽利智) 일□□(一□□), □진리□차공(□珍利□次公)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이망지(?亡智) 사척(沙尺)이고, 탁(喙)의 소술지(所述智)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비협□□지(比?□□智) 사척간(沙尺干)이고, 본피(本彼)의 말□지(末□智) 급척간(及尺干)이고, 탁(喙)의 □□지(□□智) □□□이고, 사탁(沙喙)의 도하지(刀下智) 급척간(及尺干)이고, 사탁(沙喙)의 □□지(□□智) 급척간(及尺干)이고, 탁(喙)의 봉안지(鳳安智) □□□이다. □□등(□□等)은 탁(喙)의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부지(□□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탁(沙喙)의 감력지(甘力智) □□간(□□干)이다. □대등(□大等)은 탁(喙)의 말득지(末得智) □척간(□尺干), 사탁(沙喙)의 칠총지(七聰智) 급척간(及尺干)이다. 사방군주(四方軍主)로서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는 사탁(沙喙)의 등□□지(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한성군주(漢城軍主)는 탁(喙)의 죽부지(竹夫智) 사척간(沙尺干)이고,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는 탁(喙)의 복등지(福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급척간(及尺干)이다. 상주(上州)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숙흔지(宿欣智) 급척간(及尺干), 탁(喙)의 차질지(次叱智) 나말(奈末)이다. 하주(下州) 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춘부지(春夫智)대나말(大奈末), 탁(喙)의 취순지(就舜智) 대사(大舍)이다. 우추실□□서아군(于抽悉□□西阿郡) 사대등(使大等)은 탁(喙)의 북시지(北尸智) 대나말(大奈末), 사탁(沙喙)의 수정부지(須?夫智) 나□(奈□)이다. □위인(□爲人)은 탁(喙)의 덕문형(德文兄) 나말(奈末)이다. 비자벌정(比子伐停) 조인(助人)은 탁(喙)의 멱살지(覓薩智) 대나말(大奈末)이다. 서인(書人)은 사탁(沙喙)의 도지(導智) 대사(大舍)이다. 촌주(村主)는 망총지(?聰智) 술간(述干),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이다.

 

                                     *진흥왕 척경비(眞興王拓境碑)

 

   본 비는 판독(判讀)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지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제1행 제1자에서 제8자까지로 제기부분(題記部分)에 해당되고, 둘째 부분은 제1행 제11자에서 제11행 제1자까지로 기사부분(紀事部分)이며, 세째 부분은 제11행 제3자에서 제27행 마지막자까지로 수가인명부분(隨駕人名部分)이다.

 

   기사부분의 내용에 대해 이를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누어, 제1단락(제1행 제10자에서 제3행 제14자까지)은 건립배경(建立背景)을, 제2단락(제3행 제15자에서 제5행 제18자까지)은 토지(土地) 등 경제관련업무 담당체계의 수립을, 제3단락(제5행 제19자에서 제8행 제26자까지)은 경제관련 범죄의 처벌규정을, 제4단락(제9행 제1자에서 제11행 제1자까지)은 경제관련 범죄에 대한 처벌의 처리체계 및 감독권(監督權)의 소재를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盧鏞弼).

 

                                                *비문의 일부

 

 

   수가인명부분은 수행인물(隨行人物)들이 지닌 관직에 따라, 갈문왕(葛文王)을 포함하여 대(등)(大(等)) 관직 소지자의 인명을 나열한 부분(人名列記部分 : 제11행 제3자에서 제17행 제24자까지), □대등(□大等) 관직 소지자의 인명을 나열한 부분(제17행 제25자에서 제18행 제25자까지), □대등(□大等) 관직 소지자의 인명을 나 열한 부분(제18행 제26자에서 제19행 제19자까지), 사방군주(四方軍主) 관직 소지자의 인명을 나열한 부분(제19행 제20자에서 제21행 제26자까지), 사대등(使大等) 관직 소지자의 인명을 나열 한 부분(제22행 제4자에서 제24행 제25자까지), 여타 하급관직 소지자 인명을 나열한 부분(제24행 제26자에서 제26행 제17자까지), 촌주(村主) 관직 소지자의 인명을 나열한 부분(제26행 제18자에서 제27행 제11자까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비문의 일부

 

   제1행에 보이는 ‘신사년(辛巳年)’이라는 간지(干支)와 『삼국사기』지리지에 ‘火旺郡 本比自火郡(一云非斯伐) 眞興王十六年置州 名下州 二十六年 州廢 景德王改名 今昌寧郡’이라 하여 창녕이 신라의 영토로 되어 하주가 설치된 시기가 진흥왕 16년이라는 사실, 그리고 본 비문에 보이는 ‘寡人幼年承基’라는 귀절 및 ‘另(武)力智 迊干’·‘居柒夫智 一尺干’이라는 인물 등에서 미루어 볼 때, 신사년은 진흥왕 22년(561)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진흥왕의 4비(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가운데「창녕비(昌寧碑)」를 제외한 나머지 세 비의 서두(序頭)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순수비로 보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창녕비」의 경우에는 모두(冒頭)에 ‘순수관경’이라는 명기가 없어 그 성격을 규정하는 데 여러 가지 견해가 표명되었다. 크게 보아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로 보는 견해, ‘척경비(拓境碑)’로 보는 견해, ‘군신회경비(君臣會慶碑)’ 또는 ‘군신회맹비(君臣會盟碑)’로 보는 견해, ‘전군지휘관회의비(全軍指揮官會議碑)’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공식명칭은「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 여기서는 일단 공식명칭을 따르기로 한다. 

 

*비문의 일부


   본 비에는 진흥왕이 어려서 즉위하였다는 사실이 나오고, 갈문왕(葛文王)·상대등(上大等)·대등(大等) 등 중앙의 중요관직 명칭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대일벌간(大一伐干)을 비롯하여 많은 관등이 나오고, 탁부(喙部)·사탁부(沙喙部)·본피부(本彼部) 등 6부(六部)의 명칭이 보이며, 군주(軍主)·당주(幢主)·도사(道使)·사대등(使大等) 등 중요 지방관직명이 나오고 있다. 또한 사방군주(四方軍主)와 군주의 보좌관인 조인(助人)이 나오며, 촌주(村主)라는 지방유력자(在地有力者)의 직명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비문은 이 시기의 정치사(政治史)·사회사(社會史)·제도사(制度史)·군제사(軍制史)의 실상을 밝히는 데 제1급의 사료라고 할 수 있다.

 

 

 

<2007. 4. 28>

'◈한국문화순례◈ > 낙남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녕 석빙고  (0) 2007.05.11
창녕 탑금당치성문기비(塔金堂治成文記碑)  (0) 2007.05.10
창녕 척화비  (0) 2007.05.08
창녕 객사(客舍)  (0) 2007.05.07
창녕 퇴천리 삼층석탑  (0) 2007.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