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만호봉
경주에서 단석산(827m) 다음으로 높은 산인 토함산(745m)은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신라시대 오악 중의 동악(東岳)이다. 만호봉(542.2m)은 이 토함산의 북서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만호봉은 행정구역으로 덕동(德洞)에 속하며 국도 4호선을 타고 감포 방향으로 가다보면 덕동호가 끝나는 지점의 시부거리 마을 서남쪽으로 우뚝 솟은 가파른 봉우리이다. 하지만 산의 지형상 남쪽이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남서향으로 2km여 떨어진 하동(鰕洞)에서 진입로가 개설되었으며, 등산객을 제외하고는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산이다.
*만호봉 오르는 길가의 용담
*용담
지도상에는 '만호봉(曼湖峯, 漫湖峯)'이라 표기하고 있으나 마을에서는 '마루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명이란 참 예견적인지도 모른다. 만호봉이란 산 이름에 하필 호수 호(湖)자가 들어간 것도 의아스러운데 현대에 들어와 봉우리 아래에 덕동호가 생겼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만호봉이 주목 받은 일은 거의 없으나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사일 기지를 세운다는 목적으로 하동에서 이 지역 일대까지 군사용 도로가 개설되어 지금까지 간이 헬기장 4개소를 유지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잇으며, 1970년대 후반에 솔잎혹파리가 이 일대의 소나무를 전폐시키자 벌목과 식목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마을을 벗어나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만호봉 오르는 길에서 본 토함산
*만호봉 오르는 길가의 쑥부쟁이
그것도 이 봉우리의 해발 470m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분포하는 일명 거품돌(화산암)을 무단으로 채취해 가면서의 일이다. 이 당시 벌목 운반차량은 정원석으로 쓸 큰 돌들을 수십차량 반출하여 희귀석의 분포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90년대 후반에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등산객이 들고 옮길 수 있는 크기의 돌들을 하나 둘 주워 가면서 이를 방지하자는 차원의 신문 방송 보도가 몇 차례 나간 바 있다. 2000년대 들어서서는 국제신문에서 '보문 엑스포장(신평 보불로 삼거리)-만호봉-토함산' 코스의 등산로가 소개되면서 찾는 이가 빈번해졌다. 그나마 만호봉의 위치가 대다수의 지도에서 남서쪽으로 500m 쯤 떨어진 해발 470m 지점을 표기하고 있어 무분별한 암석의 반풀을 막아 주고 있다.
*만호봉
*만호봉
봉우리의 동남쪽 골자기는 '절터골'이며, 기슭에는 절터가 있으나 사역의 규모와 잔존하는 유물 없이 기와편만 보일 뿐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옛날에 이곳에서 '신라 때 절에 성했으나 어느 시기에 빈대가 많아 절이 망했다' , '이곳에서 금부처를 캐 갔다', '주춧돌로 사자를 다듬어 갔다'는 말이 있다.
또 만호봉 북쪽 아래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덕동호에 수몰된 지역이지만 '유리방'이라는 마을 지명이 있어 이곳에서 신라시대에 유리보석을 캤다거나 유리를 구웠다는 이야기의 전래는 이 암석에 많이 붙어 있는 소금 같은 유리질을 채집하는 마을이 있었는데 유래하는 것 같다.
*만호봉에서 본 토함산 정상
*만호봉에서 본 토함산 정상
경주 주변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화산암 같은 돌의 산분포지인 만호봉에는 해발 470m부터 정상부까지는 봉우리 전체가 거품돌로 채워져 있다. 돌은 희거나 검붉은 색을 띠며, 꼭 비누거품이 그대로 굳어서 돌이 된 것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표면에는 소금을 뿌려 놓은 듯이 미세한 수정체가 가득 붙어 있어 햇빛에 반짝인다.
암석 전공자인 김상욱 박사(경북대 교수)는 이곳의 암석에 대한 제보를 접하고는 처음 보는 돌이라 하고 직접 방문하여 확인한 결과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지만 지층이 갈라져서 고온의 엄청난 가스가 분출되면서 만들어진 암석이라고 하였다. 즉 화산폭발 전단계로서 암석이 고온고습에 녹아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밀려나와 굳어지면서 기체에 포함된 수정 같은 유리질이 급속도로 식으면서 결정체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더욱이 이정도 규모이면 실로 엄청난 양의 수증기 가스가 분출되었다는 것이다.
*거품돌
*거품돌 알갱이
*거품돌
*거품돌 알갱이
*거품돌 알갱이
이와 관련하여 유추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두 군데 전한다.
(1) 31년(609) 정월에 모지악(毛只嶽) 아래에 땅이 탔는데 너비 4보, 길이 8보, 깊이 5척이더니 10월 15일에 이르러 없어졌다.(三十一年春正月毛只嶽下地燒廣四步長八步深五尺至十月十五日滅)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조>
(2) 4년(657) 7월......동쪽 토함산(吐含山)의 땅이 타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없어졌다.(東土含山地燃三年而滅)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
이 두 기록은 산의 일반적인 화재가 아닌 땅의 이상 현상에 의한 연소 내지는 연기분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무척 중요하다. 이병도 박사는 삼국사기 해제에서 이 두 기록의 현상을 '가스분출' 또는 이에 의한 화재라고 해석하였다.
*만호봉 오르는 길에서 본 보문호
*가을 하늘
그런데 사료(1)의 지명인 모지악(毛只嶽)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다만 '신라의 동기정(東畿停)을 모지정(毛只停)이라고도 하니 모지악도 이 부근의 산<이병도>'이라는 설과 막연하게 '신라왕경(경주)의 동쪽'이라는 설이 있다.
사료(2)는 지명을 '동쪽의 토함산이라고 하여 왕경에서 보아 동쪽에 있는 토함산을 정확하게 지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기록에서 언급한 3년간의 연소가 만호봉의 가스분출과는 불가분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토함산의 어느 봉우리에서도 이러한 사실적 뒷받침을 해 주는 근거가 만호봉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무열왕 4년(657)에 이 만호봉의 가스분출은 3년 동안 이어져 서울 장안에서 보았을 때 장관을 이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 모르고 피어난 진달래
*진달래
*감국
이제는 옛 기록을 통한 사료적 가치를 발굴하여 사적(史蹟)으로서의 제 위치를 찾게 하고, 방치되고 보존되지 못한 암석을 보존하기 위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방안도 마련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 이것이 도리어 만호봉의 돌을 외부로 알리는 역할을 하여 훼손을 부채질하는 일인지도......
*하동 저수지
<2006.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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