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월성

蔥叟 2006. 6. 3. 08:25

경주 월성

 

오늘날 흔히 반월성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신라 당시의 이름은 월성이었다. 또는 신월성이라고도 불렀다. 그것은 성의 모양이 신월(新月), 즉 초승달 모양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반월성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신라시대의 궁성 가운데 기록에 등장하는 것으로는 금성, 만월성, 신월성, 월성, 명활성등이 있는데 BC37년에 금성을 쌓았고, AD101년 파사왕 때 월성을 400년대 중반에 명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신월성(新月城)을 쌓고 그후에 만월성(滿月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중간에 가끔 왕궁을 잠깐씩 이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이 진짜 월성이냐는 문제인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궁궐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금성의 위치를 잘 알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의 기록상 금성 동남쪽에 월성이 있고 월성 동쪽에 황룡사가 있으며 월성은 초생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신월성(新月城)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황룡사터는 월성의 정동쪽에 아니라 약간 북동쪽에 위치한다. 또 경주고등학교와 경주역 사이에 위치한 전랑지(殿廊址)가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건물터 가운데에는 가장 큰 건물로 밝혀졌기 때문에 여기가 궁성이었고 따라서 전랑지가 월성이고 반월성이 신월성일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이곳만을 월성으로 보기는 힘들고 월성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그 범위가 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전랑지가 월성이라면 금성은 현재의 읍성터일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기록에 의하면 파사왕 때 월성을 축조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신라’라는 국호가 정착되기 이전으로 사로국(斯盧國) 연맹시절이었다. 실제로 ‘신라(新羅)’라는 국호가 확정된 것은 지증왕 4년(503)의 일로 나라의 규모가 커져 그에 걸맞게 ‘덕업일신 사방망라(德業日新 四方網羅)’에서 한자씩 따온 것이다. 그러니까 파사왕 당시에는 이렇게 큰 궁궐을 짓기에는 국력이 미약하였다. 신라가 오늘날의 경북지역을 영토로 차지한 것은 대체로 17대 내물왕 이후부터인데 이때 고대국가의 완성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그 진위논쟁으로 시끄러웠던 화랑세기에는 구지(溝池)라는 용어가 나온다. 즉 화랑세기 5세 풍월주 사다함 조에는 무관랑이 도망을 가던 중 밤에 궁의 담장을 넘다가 ‘구지’에 덜어져 다쳤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나오는 궁의 담장은 왕궁인 월성의 담장이 분명하다. 그리고 구지는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성 밑에 파놓은 도랑(溝) 과 연못(池)’을 뜻한다. 월성주변에 구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198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을 통하여 알려졌다. 특히 월성주변의 구지는 구(溝)와 지(池)가 연결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구지가 발견되기 전에는 구지의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구지라는 용어를 통하여 화랑세기가 위작일 수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 같다.


1988년에 발굴한 결과 성곽의 방어시설인 해자(垓字)터가 나왔으며 뻘층에서 토기편을 비롯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제작시기로 보아 대체로 5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월성이 기능 했던 것으로 결론지어졌는데 이것은 21대 소지마립간 시절인 488년에 명활성에서 월성으로 궁성을 옮겼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BC57년에 건국하여 935년에 멸망할 때까지 992년 가운데 절반의 기간 동안만 이곳을 왕궁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 문무왕 때까지의 유물만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 후에는 외적의 침입할 위험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해자가 더 이상 방어시설로서의 의미가 없어져 단순한 물길로서의 기능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이 신라 초기부터 왕성이었다면 주변에도 도시가 발달했을 것이지만 가까운 곳에 고분군이 있다는 것은 이곳이 권력의 중심기관이 있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월성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첫째, 석탈해가 동해에서 토함산으로 올라와서 월성을 살펴서 월성에 있던 호공의 집을 빼앗았던 일.

둘째, 선덕여왕 시절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군 대장이었던 김유신이 이곳을 본거지로 했던 일.

셋째, 경덕왕 시절 찬기파랑가를 지었던 충담스님이 남산의 삼화령에 있던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하고 내려오다 왕을 만나 월성의 서문인 귀정문에서 왕을 위하여 안민가를 지었던 일. 오늘날에는 차가 귀한 음식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차가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지금까지도 제사를 차례(茶禮)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삼국지의 유비가 노모의 병을 고치려고 1년동안 열심히 일하여 낙양에 가서 차를 구해올 수 있었던 것 등은 차가 매우 귀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신라하대에는 쿠데타에 관한 기록이 주로 등장한다.

 

당시에는 월성의 정문이 서문인 귀정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귀정문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사신이 서쪽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인데 귀정문을 통하여 금교를 건너서 영천과 대구를 지나 서해안의 당항성이나 당진을 거쳐 중국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역사과학관에 있는 신라왕경도(新羅王京圖)에는 중심에 주작대로가 있고 북문이 월성의 중심으로 그려져 있는데 발굴결과 주작대로는 13m밖에 되지 않았고, 월성의 주출입문으로서 역할을 한 귀정문을 무시하고 있다.

 

*월성

 

*월성

 

*월성

 

*월성 성벽

 

*월성 내부

 

*월성 내부

 

*월성 내부

 

*월성 내부

 

*월성 동문터

 

*월성 서문터

 

*월성 남문터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월성 해자

 

*남천, 월성의 자연해자구실을 하였다.

 

*남천

 

*남천

 

 

<200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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