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월정교터

蔥叟 2006. 6. 5. 08:31

경주 월정교터

 

월정교(月精橋)는 월성에서 남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 위에 놓여져 있던 다리이다. 이곳은 왕궁 바로 남쪽으로 오늘날로 치면 종로 1번지에 해당한다.

 

삼국시대에는 궁궐인 월성의 서쪽문인 귀정문(歸正門)을 지나 오늘날 경주공고 옆의 서천에 놓여있던 송교(松橋) 또는 금교(金橋)를 통해서 중국으로 갔으며 지금의 터미널 남쪽지점에서 사신을 맞이하곤 했었다. 그러나 통일 후 월정교가 가설되면서부터는 주로 월정교를 이용하였다.

 

월정교는 750년 전후 경덕왕 때에 만들어진 다리로써 동쪽의 일정교와 함께 가장 규모가 크고 튼튼한 다리였었다. 신라 992년의 역사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문화적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이다.

 

이 다리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고려시대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월정교를 주제로 한 시의 내용 중 「홍교도영조문천(虹橋倒影照蚊川)」이라는 구절에서 알아볼 수 있다. 즉 ‘무지개 다리’(虹橋)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구름다리를 이르는 것이다. 이 시가 동국여지승람 경주고적조에 전하고 있어 월정교는 남천을 건너는 가장 중요한 다리로 고려시대까지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은 다리는 무너졌지만 그 교각이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옛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80년대에 복원계획을 세우고 발굴한 결과 교각지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공사비 때문에 복원계획은 계획으로만 끝나버리고 교각지만이 옛 모습을 지닌 채 물소리만이 잔잔히 들리고 있다. 또한 1280년 일연 스님이 입적하기 9년 전에 보수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월정교는 1984년부터 86년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북측교대와 남측교대의 거리가 60.56m이며 그 사이에 4개의 교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교각간의 거리는 12.55m이며 남북교대와 교각간의 거리는 11.46m였다. 월정교는 다리의 전체 길이가 약 63m, 폭 11m정도의 큰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충담 스님이 삼화령에서 경덕왕의 부름을 받고 이 다리를 건너서 귀정문을 통해서 월성으로 들어갔다.

 

경덕왕이 3월 삼짇날 귀정문(歸正門) 문루 위에 나와 앉아 측근자들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에 나가 훌륭하게 차린 중 한 명을 데려올 수 없을까?”하였다. 이때 마침 풍채가 깨끗하게 생긴 중 한 명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을 측근자들이 바라보고 그를 데려와 현신 시켰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훌륭하게 차린 중이란 저런 중이 아니다” 하고는 그를 물리쳤다.


또다시 웬 중 한 명이 누비옷에 벚나무로 만든 통을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와이 그를 보고 기뻐서 문루 위로 맞아들였다. 왕이 그 통 속을 들여다보니 차 달이는 도구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너는 대관절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중이 대답하기를 “충담이올시다” 라고 하였다.

왕은 또 묻기를 “어디서 오는 길인가?” 하니 중은 “소승이 3월 삼짇날(重三)과 9월9일(重九)이면 남산 삼화령에 있는 미륵세존님께 차를 달여 올립니다. 지금도 차를 올리고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도 차 한잔을 얻어먹을 연분이 있는가?” 하였더니 중은 곧 차를 달여 바치는데 맛이 희한하고 찻종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코를 찌를 듯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기는 대사의 기파랑을 찬미하는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하니 그는 대답하여 “그렇소이다” 하였다.

왕이 “그러면 나를 위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도록 다스리는 노래를 지으라” 하니 중이 당장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칭찬하고 그를 왕사로 봉하니 중은 공손히 절을 하면서 굳이 사양하여 이 직책을 받지 않았다. 이 노래가 바로 안민가(安民歌)이다.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

 

월정교 서쪽 약 19m 아래 지점에서는 목교(木橋)의 교각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나무의 종류는 잣나무였다고 한다. 개울 바닥 깊숙히 묻혀 있어 부패되지 않고 잘 보존된 채로 발굴된 이 목교의 교각간의 간격은 4.9m로 8개가 확인됐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와 요석공주의 전설이 어려있는 유교(楡橋)가 있었는데 느릎나무가 아닌 잣나무 유적이 발견됨으로서 후대에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천에는 이처럼 여러개의 다리가 놓여있어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이루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줬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단 하나의 다리도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북천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것은 당시에 북천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명활산 쪽에서 흐르는 물은 경주분지를 가로질러 여러 개의 실개천 형태로 흘렀던 것이다.

 

*월정교터 전경

 

*월정교터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교각

 

*월정교터 북측 교대

 

*월정교터 교대

 

*월정교터 석재 결구방법이 불국사 석축과 같다

 

*월정교터 교대

 

*월정교터 석재와 월성 성벽

 

*월정교에 사용된 석재

 

*월정교에 사용된 석재

 

*월정교에 사용된 석재

 

*월정교에 사용된 석재

 

*월정교에 사용된 석재

 

*월정교에 사용된 석재

 

*석재 가운데에는 석등 간주석도 있다

 

*석재 사이에 피어난 매꽃

 

 

<200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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