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빙고
석빙고(石氷庫)는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인데 석빙고 좌측에 있는 비문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에 목조 빙고를 석조 빙고로 다시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는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이라는 명문이 있어 4년 뒤에 동쪽으로 100m 정도 옮겨 현 위치에 다시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옮기기 전의 옛자리에는 웅덩이가 남아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 원래는 나무와 풀로 만든 목빙고(木氷庫)였는데 해마다 수리를 하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천변 경사진 곳에 설치하여 얼음을 떠서 운반하기에 편리하며 배수가 잘 되어 얼음이 녹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얼음에 관한 신라시대 기록으로는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하였고 유리왕(노례왕) 때 빙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보인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여름에 사용한 예가 적어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석빙고를 짓는 곳은 먼저 하천과 가까워야 채빙하기가 용이한데 아마도 남천의 얼음을 채빙하여 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녹은 물이 잘 처리되도록 경사진 곳에 만들었다. 얼음이 녹지 않도록 짚과 왕겨를 덮고 갈대를 덮었다고 한다.
이곳에 보관한 얼음은 왕실에 환자가 발생하면 찜질을 하는 데도 사용하였고 공신들에게 선물로 지급하거나 여름휴가 때에도 지급하였다. 얼음은 대단히 귀하고 중요시하여 강력하게 통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석빙고는 원래 있던 돌문 대신 철제문(鐵製門)이 달려 있지만 석빙고의 원형에 대한 연구나 분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석빙고가 축조 당시에는 돌문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학계에서는 돌문을 복원해 달아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또 돌문은 월성 내에 있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이 있어 이 돌문을 찾아 내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빙고의 돌문이 월성의 서북쪽 둔덕, 즉 계림에서 월성으로 오르는 길의 서쪽에 파묻혀 있으며, 깊이 파묻혀 있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발굴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지역 노인들의 증언도 있다.
*석빙고
*석빙고 출입구
*석빙고 외부
*석빙고 윗면
*석빙고 환기구
*석빙고 이건 흔적
*석빙고 암각
*석빙고 암각명문
崇程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
*석빙고 내부
*석빙고 좌측면 벽과 천정
*석빙고 우측면 천정과 벽
<2006.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