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은사터
감은사터는 멀리 도로가에서도 우뚝한 탑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진입로와 주차장은 울긋불긋한 벽돌이 잘 깔려있다. 진입로 옆으로 창건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연못과 돌축대가 보이고 가파른 언덕에는 방초가 우거졌다. 감은사터는 이제 전국에서 몰려드는 답사객들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다. 그들을 상대로 산나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농산물을 팔려는 시골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답사객을 유혹한다. 다시 짧은 돌계단을 올라 절터의 동쪽으로 들어간다. 금당터의 동북쪽에는 키큰 느티나무 한그루가 절터를 지키고 있어 쓸쓸함을 달래주고 있다.
*감은사터 용당과 석축
*석축의 구조
우리는 이곳에서 삼국통일 후 결집된 국력을 엿볼 수 있으며 안압지는 나당전쟁후에 국력이 결집된 곳이다. 그 당시 불국사를 창건하는데 약 25년의 기간이 필요했고 그 외의 절들도 대개 10년~20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감은사 역시 약 10년의 세월에 걸쳐 조성되었다. 문무왕 때 공사를 시작했으나 그는 끝내 낙성식을 보지 못하고 아들인 신문왕 때에 와서 이루어졌다. 본래 진국사(鎭國寺) 란 이름으로 창건될 예정이었으나 신문왕이 공사를 마치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로 고쳤다.감은사는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장례식에 맞춰서 낙성한 절이다. 문무왕은 불력으로 동해에 침입하는 왜구를 물리치고자 이곳 동해구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였다.
*석축이 불국사 석축의 원형으로 보인다.
*감은사터 용당의 석축
문무왕을 이은 신문왕이 이듬해에 완성하여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 이름짓고 문무왕의 장례식도 직접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감은사에서 어떤 역사적 행위가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말에 왜구들이 동해구 일대에 출몰하여 절을 약탈하여 절에서 사용하는 집기를 경주에 와서 가져가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80년대에 발굴한 결과 조선시대에는 작은 암자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극문양와 기하학 문양석
*태극문양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으로 서탑이 기울어져 그해 10월 해체 보수하였는데 3층 몸돌에서 방형의 사리공이 있었고 사리공의 북쪽에 사리장치가 들어있었으며 남쪽에는 찰주가 꽃혀 있었다. 1996년에 동탑을 해체복원하였는데 역시 서탑과 같은 구조의 사리공에서 사리함이 나왔다. 동탑의 사리함에는 동서남북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으며 서탑에는 역시 동서남북에 주악천인상이 새겨져 있었다. 황복사, 황룡사, 창림사 등에서처럼 명문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끝내 감은사 탑에서는 사리함 명문이 나오지 않았다. 명문이 출토되면 사라졌던 감은사의 역사를 다시 복원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무너졌다.
*넘어진 석등 간주석
*감은사터 금당과 동서 삼층석탑
감은사의 금당구조는 익산 미륵사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통일신라문화의 뿌리가 미륵사에 있다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는 백제 30대 무왕과 그의 왕비이자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만든 것이다. 이때 진평왕은 신라의 장인들을 파견하여 미륵사 창건을 도왔다. 또 선덕여왕 때에는 백제의 장인이 신라의 황룡사 창건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당시 두 나라는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감은사터 금당터
*감은사터 금당터
미륵사는 이른바 3원식 가람이다. 중앙에 목탑을 두고 좌우에는 같은 모양의 석탑을 배치하고 3개의 금당을 두었으며 각 금당 사이에는 회랑을 둘렀다. 여기서 가운데 목탑과 동서 금당을 제외하면 쌍탑일금당의 가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경주의 사천왕사, 망덕사, 감은사로 이어지는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기본 양식이 된다. 사실 1개의 사찰에 2개이상의 탑을 동시에 세우는 것은 미륵사가 첫 케이스이다.
*금당터 계단
*금당터와 동삼층석탑
금당의 구조도 신라의 사찰은 미륵사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금당 축대에 판석을 세우는 것도 미륵사가 처음인데 신라의 감은사나 불국사 등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금당 내부에 흙으로 단을 쌓고 돌기둥 위에 장대석을 얹어 그 아래에 지하 공간을 만들고 장대석 위에 초석을 놓은 구조는 미륵사와 감은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감은사터는 미륵사터 보다 먼저 발굴하였다. 그때 지하 공간을 보고 문무왕이 변한 용이 들어와 쉬도록 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했다. 하지만 미륵사를 발굴한 결과 같은 구조임이 밝혀졌는데 그렇다면 미륵사에는 누구를 쉬게 하기 위한 공간이었을까? 이러한 금당의 지하구조는 미륵사와 감은사 외에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륵사 강당에는 여러개의 계단이 있고, 출입문도 동서남북에 4개를 만들었는데 이는 인도에서 배워온 것이라고 한다.
*금당터 지하구조물
*금당터 지하구조물
감은사터를 발굴했을 때 스님들의 생활공간이 없었다. 서편에 작은 규모의 승방터(僧房址)가 있었을 뿐이다. 동해구는 왜구들이 끊임없이 출몰하던 절이다. 그래서 진평왕은 이곳에 선부서를 설치하였고, 이후 동해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되었으며 그래서 이곳에 절을 지을 수도 있었다. 선부서의 군인들이나 어민들도 많아 절을 찾았겠지만 특히 이곳은 문무왕의 원찰로 바뀌었을 것이다. 신라의 역대왕들은 개인의 원찰을 많이 지었고 그 절은 대개 왕릉 옆에 세워졌다.
*금당터 동쪽 구멍
*금당터 지하구조물의 결구
감은사의 중문터 앞에는 용연이라고 하는 못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흥륜사와 영묘사에도 못이 있었으며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앞에도 구품연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백제의 가람배치 양식에서 배워온 것으로 부여 정림사오층석탑 앞에도 역시 연못이 있다.
*금당터 지하구조물
*금당터 지하구조물
*구조물의 결구
*강당터
*강당터
*강당터 초석
*동회랑터
*서회랑터
*서회랑터 기둥구멍
*서익랑터
*감은사터에서 출토된 기타 석재들
*감은사터 표지석
*고적제470호 경주감은사지
*석재들
*석재들
<2006.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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