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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의 북망산천 - 경주 장산토우총

蔥叟 2022. 6. 7. 07:26

서악동 고분군이 있는 선도산의 한 자락이 꼬리를 트는 야트막한 구릉에는 경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분이 집단적으로 분포하는 곳이다. 이산을 장뫼(障山)라고 부르고 이 고분군을 장산 고분군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고분들은 모두 석실분인데 법흥왕 이후부터 무열왕계의 왕족들로서 6세기 이후 4500년간 신라사를 이끌고 간 주인공들의 무덤이다. 한마디로 말해 신라인들의 북망산천(北邙山川)인 곳이다.

 

현재 장산 고분군의 무덤들은 90%이상이 도굴되었고 봉토는 무너져 내리고 봉토 위에는 나무가 자랐으며 소형의 고분은 예비군 훈련장 참호로 이용되는 등 훼손의 정도를 이루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곳을 정비하고 학술적 조사를 거쳐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면 아마도 천마총 이상의 자원이 될 것이지만 아직 우리 나라의 문화행정은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답사객들이 모두 장산고분군을 걸어서 돌아보기로 했다. 야트막한 구릉 군대군대에는 허물어진 고분들이 수십기 보이는데 고분 위로 나무들이 고분의 높이 보다도 더 크게 자라나서 그냥 무심코 바라보면 고분인지조차 구별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고분군을 돌면서 어느 답사객이 공동묘지다.”라고 외쳤다. 그렇다 공동묘지다. 신라인들의 공동묘지. 여기서 나는 같은 의미를 가진 낱말이라 할지라도 그 어감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공동묘지 하며 뭔가 으스스하고 사람이 올 곳이 못되는 곳 등으로 자리매김된다. 하지만 고분군이라고 불렀을 때에는 다정한 우리의 문화재로 다가옴은 무엇 때문일까?

 

장산고분군의 남쪽 끝자락에는 수많은 고분 가운데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유일한 고분인 장산토우총이 있으니 오늘의 첫 답사는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신라의 고분은 조기(기원전후AD35)의 토광묘 시기, 전기(AD3506세기초)의 적석목곽분 시기, 후기(6세기 이후)의 횡혈식석실분으로 나뉘는데, 장산 고분군은 후기의 횡혈식석실분이다. 현재 경주지역에서 내부를 개방하는 석실분은 장산토우총과 구정동방형분이 유일하다.

 

석실분은 노서동의 쌍상총일 가능성이 높다. 이때는 적석목곽분과 공존기였다. 진평왕릉 북쪽의 명활산 고분군의 부부총도 석실분과 적석목곽분이 한 무덤 안에 공존하고 있으며 건천 방내리 고분군 역시 정상에는 적석목곽분이 아랫부분에는 석실분이 있다.

 

적석목곽분은 평지에 만들어지며 피장 유물이 많은 후장(厚葬)에 속한다. 또한 단 1명의 피장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며 만드는데 엄청난 비용과 인력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영혼불멸설(靈魂不滅設)에 입각한 생전의 권력만큼이나 유물을 부장(副葬)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에 따라 순장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석실분은 3명에서 많게는 10명까지 묻을 수 있으며 자식이 죽으면 뼈를 한쪽으로 모으고 또 묻을 수 있는 경제적인 무덤이었다. 위치 또한 산지에 있기 때문에 농토를 잠식하지도 않았다 부장품도 최소한으로 줄여서 박장(薄葬)을 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불교가 공인된 후 내세관의 변화에 따라 봉분의 크기와 부장품의 양을 줄이게 된 것이다.

 

토우총은 경주박물관의 박일훈 관장과 이종성씨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이때 토우 잔편이 발견되어 토우총(土偶塚)이라고 명명되었다. 시체를 놓았던 시상대는 동서로 놓여있었고, 출입문은 남쪽으로 나있다. 시상대는 두 구의 시신이 누울 수 있는 것과 그보다 한단 낮게 또 한 구의 시신이 누울 수 있도록 되어있으며, 동쪽에는 머리를 고정시키는 돌배게인 두침(頭枕)이 있고 서쪽에는 발을 고정시키는 발받침인 족좌(足座)가 설치되어있다.

 

▲입구
▲입구
▲2인용 시상대
▲2인용 시상대
▲2인용 시상대(위)와 1인용 시상대(아래)
▲2인용 두침
▲1인용 두침
▲족좌
▲벽면
▲천장
▲천장

 

 

<2022.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