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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격전지 - 남원성

蔥叟 2018. 5. 21. 08:15

임진왜란의 격전지 - 남원성 

 

남원읍성(南原邑城)은 조선시대 읍성으로 1982년 11월 3일 대한민국 사적 제298호 남원성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남원읍성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중국의 성에 영향을 받은 네모 반듯하게 축조한 평지 읍성이다. 판상할석(板狀割石)을 사용한 협축법으로 축조되었으며, 규모는 둘레 2.5 km 정도, 높이는 4m정도이다. 옹성(甕城)이 16곳, 여장(女墻)이 1,016개에 달한 성곽이었으며, 성벽 바깥으로 깊은 도랑[溝]을 두른 큰 성이었다. 4방으로 성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남문이 가장 장대하여 홍예문 위에 누각을 올려 완월루(翫月樓)라 하였다. 북문 및 북벽은 복원될 예정이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였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해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돌축대의 길이는 2.4km가 넘고, 높이 약 4m에 이르며 성 안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 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너비가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구성을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며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 성내의 가로 구성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 반듯한 구성과 성내의 가로가 직선으로 구성된 점이 흥미롭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문왕 11년(691년)에 "남원성을 쌓았다" 고 적혀있지만, 지금의 남원성과는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조선시대 철종 18년(1862년) 개축한 것이다.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북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조명 연합군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배해 모두 살해당하고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남원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이복남, 임현, 정기원, 신호 등은 성문으로 잠입하여 성을 점령한 5만 8천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 등은 성을 탈출하였다.

 

▲남원성

 

▲남원성

 

▲남원성

 

 

 

  <2018.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