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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와 곡식의 신 - 남원 사직단

蔥叟 2018. 5. 22. 08:16

토지와 곡식의 신 - 남원 사직단 

 

종묘(宗廟)와 함께 나라의 신과 곡식을 맡은 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 사직단의 위치는 『주례(周禮)』에 잘 규정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사직, 왼쪽에 종묘’라 하였다. 이 규정은 법궁을 중심으로 사직은 오른쪽에, 종묘는 왼쪽에 둔다는 뜻이며, 중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준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종묘는 수도 한 곳에만 설치하는 데 반해 사직은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州縣)마다 설치하였다. 주현의 사직도 관아의 서쪽, 곧 오른쪽에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檀)을 따로 설치하였으며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각 단에는 다섯 가지 색깔의 흙을 덮었는데 동은 청색, 서는 백색, 남은 적색, 북은 흑색, 중앙은 황색 흙으로 하였다. 또한 각 단에는 신위를 모셨는데 사단에는 국사신(國社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토신(后土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으며, 직단에는 국직신(國稷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직신(后稷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다. 각 단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 둘레에는 유(壝)라고 하는 울타리를 치고 그 유에도 사방으로 문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에도 크게 변화가 없었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성부 의인달방(儀仁達坊)에 있는데 지금의 사직공원 자리이다. 그 규모는 단을 2개로 만들어 사단(社壇)은 동쪽에, 직단(稷壇)은 서쪽에 배치하여 사방이 각각 2장 5치로 북쪽에서 남으로 향하게 하였고, 높이는 3척인데 사방으로 계단 3층을 쌓았다. 단상에는 각각 2척 5치 정도의 석주(石柱)가 있다. 사단에는 국사(國社)의 신위를 남쪽에서 북을 향해 봉안하고 후토신(后土神)을 배향시켰으며, 직단에는 국직(國稷)의 신위를 봉안하고 후직(后稷)의 신을 배향시켰다. 1393년(태조 2) 풍수학인(風水學人)인 이양건(李陽建)과 배상충(裵尙衷)을 시켜 자리를 잡게 하고 이듬해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위판(位版)은 길이가 2척 2치 5푼, 너비가 4치 5푼, 두께가 7푼이며, 받침의 둘레는 사방이 8치, 높이는 4치 6푼이다. 모두 봉산(封山)의 밤나무로 만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옮겼다가 훼손되어서 다시 건립하였다.

 

부속 건물은 전사청(典祀廳)·집사청(執事廳)·부장직소(部長直所)가 있다. 1694년(숙종 20)에 중수하면서 전사청과 좌우 집사청을 세웠고, 1702년 부장직소를 후면에 건립하였는데, 위치가 출입하는 사람을 살피는 데 불편해 1742년(영조 18) 출입문 옆으로 옮겨지었다. 제례는 문묘(文廟)와 종묘의 예에 따르고 2월과 8월 및 동지와 제석(除夕)에 행하였다. 그 밖에도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의 제례와 가뭄에 비를 비는 기우제(祈雨祭)와 풍년을 비는 기곡제(祈穀祭) 등을 여기에서 지냈다. 또한, 각 지방에도 관아의 서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제사지내 국태민안과 풍년을 빌게 하였다. 조선시대 지방에 산재하였던 사직단은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지방에 남아 있는 사직단은 노변동사직단(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6호), 남원사직단(전라북도 기념물 제79호), 보은회인사직단(충청북도 기념물 제157호), 산청단성사직단(경상남도 기념물 제255호), 창녕사직단(경상남도 기념물 제278호) 등이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394년(태조 3) 무렵에 서울에 사직단(社稷壇)이 세워짐에따라 전국의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에도 사직단을 세우게 되었는데, 남원 사직단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79호. 608평 정도되는 남원 사직단지(社稷壇址)는 사방이 담장으로 둘러져 있고, 담장내에 사직단(社稷壇)ㆍ진설단(陳設壇)ㆍ사당(祠堂)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중 사직단의 면적은 17.4평으로 높이는 1.3m 정도이다. 사직(社稷)은 토지신[社]과 곡물신[稷]을 일컫는 것으로서 땅에 씨를 뿌려 식량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토지와 곡식은 나라살림의 원천이 되므로 사직은 국가를 상징하며 종묘사직(宗廟社稷)은 토지와 곡식 없이는 국가나 종묘가 존립할 수 없음을 뜻한다. 본래 사직은 중국에서 새로이 나라를 세우면 천자나 제후가 단을 세우고 맨먼저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에서 전래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해마다 정월이 되면 고을 원님들이 사직단에 나가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친히 제사를 드려 그 해의 풍년과 고장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1910년 일제 침략으로 전국의 사직단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남원 사직단은 남원유림들에 의해 유지 보존되어오고 있다. 일제의 간섭이 극심하였던 때에는 기직단제(祈稷壇祭)라 고쳐 위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계(禊)를 만들고 위토답(位土沓)을 만드는 등으로 봄ㆍ가을에 1회씩 연 2회 사직단제를 지내고 있다. 이 남원 사직단은 조선 초기에 세워져 현재까지 전해지는 제사공간으로서 이 방면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직단

 

▲사직단

 

▲사직단

 

▲사직단

 

 

 

  <2018.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