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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의 무대 - 남원 광한루

蔥叟 2018. 5. 18. 04:05

춘향전의 무대 - 남원 광한루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정원. 광한루원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이 잘 표현되어 있다. 광한루 전면 동서 양편에 평호(平湖)를 만들어 은하수를 상징하게 하였으며, 못 안에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삼신도(三神島)를 만들어 한 섬에는 대나무를, 또 한 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나머지 한 섬에는 연정(蓮亭)을 지었다.

 

또 가운데에는 연(蓮) 꽃을 심고 못을 가로지르는 오작교(烏鵲橋)를 놓음으로써 광한루원은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조경이 되었다. 광한루(廣寒樓), 춘향사(春香祠), 오작교, 비석군, 월매집, 연지(蓮池), 그네 놀이터 등이 아름다운 수목(樹木)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고전 소설 「춘향전」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황감평(黃鑑平)이 고려 때 무인난(武人亂)을 피해 남원에 낙향하여 ‘일재(逸齋)’라고 하는 조그마한 서실(書室)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황감평이 지은 일재(逸齋)의 옛터에 후손 황희(黃喜)가 1419년(세종 원년) 광통루(廣通樓)를 세웠다. 1434년(세종 16)에 부사 민여공이 주변을 고치고 새로 누각을 중수하였다.

 

1444년(세종 26) 정인지가 누각에 올라 승경에 대하여 감탄하고 주위 경치가 월궁(月宮)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흡사하다고 하여 광한루로 고쳐 불렀다. 1461년(세조 7)년 장의국(張義國)은 요천의 물을 끌어다가 누(樓)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커다란 연못을 파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오작교를 가설하였다.

 

누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1607년(선조 40) 남원부사 원진이 소실된 누각 자리에 작은 누(樓)를 세웠다. 1626년(인조 4) 신흠(申欽)의 아우인 남원부사 신감이 작은 누(樓)를 헐고 그 자리에 원래의 크기로 복원하였다. 영주각은 1792년(정조 16)에 부사 이만길이 세운 것이다.

 

1855년(철종 6)에는 남원부사 이상억이 광한루 누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라는 현판을 크게 써서 걸었다. 이 현판은 지금은 현관 옆에 걸려 있다. 1877년(고종 14)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부사 이용준이 익루를 만들었다. 1971년 경역 확장 작업으로 크고 아름답게 단장되었다.

 

광한루원은 관아에서 조성한 것이다. 자연 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이용하여 그에 어우러진 건축물을 만들고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특히 광한루원은 신선이 사는 이상향의 세계를 실현하려는 마음으로 조성하였다.

 

누각에는 분합문을 달아 열어 놓고 지내니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건물이 환하게 뚫린 느낌이 들게 하고 필요할 때만 문을 사용하였다. 누각 정면의 현판은 선조 임금의 사위였던 신흠의 아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글씨이다. 누각 천장과 벽면 가득 실려 있는 편액은 광한루의 또 다른 자랑거리로, 그 내용은 주로 광한루에 올랐을 때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에서 느낀 감회를 표현한 시이다.

 

광한루원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시와 누정기, 중수기 등으로 200여 수의 시문(詩文)이 있다. 한시를 지은 작가들이 조선시대 전기로부터 중기, 후기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 가히 조선시대 전체의 한시(漢詩) 문학을 한 곳에서 지켜볼 수 있는 한시문학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편액으로는 김종직, 정철, 신흠, 백광훈, 이경여, 송대빈 등의 작품이 있다.

 

▲광한루

 

▲광한루

 

▲광한루

 

▲광한루

 

▲광한루

 

▲광한루

 

▲'광한루' 편액

 

▲'호남제일루' 편액

 

 

 

  <2018.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