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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유리 고인돌

蔥叟 2018. 1. 20. 22:27

창녕 유리 고인돌

 

고인돌은 지석묘 또는 돌멘(Dolmen)이라고 하여 큰 판석을 탁자형으로 고인 것인데 창녕지역의 것은 남방식이다. 거대한 돌덩이를 놓고 그 아래 지하에 석곽이나 석관이 축조되어 있는 중묘제로 거석을 움직여서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큰 힘과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당시의 매장유적으로 그 사회를 상징하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그 가운데 특히 규모가 크거나 부장품이 많은 것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네 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유리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원래 7기의 고인돌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무리지어 있었는데, 지금은 파괴되어 2기만 남아있다. 그 중 한 기는 덮개돌이 있고 그 밑에 평평한 돌을 이용하여 길이 1m, 너비 0.3m의 돌 상자 형태로 무덤방을 만들었다. 이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구릉 밑이나 평지에 있는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는 달리,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이 고인돌이 지닌 학술적 가치는 바로 이 특이한 입지조건에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건조된 것도 있지만 유리 고인돌처럼 덮개돌 윗면이 평평한 것들은 간혹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유리 고인돌은 발굴결과 매장주체부가 발견되어 무덤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거대한 상석 밑에 지하 석관이 있으며 석관은 널빤지형의 돌조각을 이어서 만든 것으로 크기는 100×30×30cm 이다.

 

창녕지방은 청동기시대부터 농업이 정착되고 많은 인력이 동원되는 고인돌을 축조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이미 인간의 문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다른 지방보다 앞서서 부족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장마면 유리 고인돌은 웅장한 모습을 한 고인돌이 북두칠성 형태로 7개나 있었다고 하며 거대한 남방식 고인돌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유리 고인돌은 거석 기념물로서는 손색이 없는 위용을 갖춘 전형적인 바둑판식으로 그 모습이 매우 웅대하며 뛰어나 전국에서 유명하다. 낮은 구릉 위에 우뚝 서 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기 뿐이다. 원래 7기의 지석이 있었으나 일제치하인 1912년 영산 박진간 도로개설 사업때 일본인이 6기를 파괴하여 석재로써 공사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7개의 바위가 북두칠성형으로 배열되어 있어 ‘칠성바위’라고도 한다.

 

▲유리 고인돌

 

▲유리 고인돌

 

▲유리 고인돌

 

▲유리 고인돌

 

 

 

<2017.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