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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蔥叟 2018. 1. 18. 21:57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관룡산(739.7m) 정상 부근의 수십길 낭떠러지 위에 홀로 앉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전체 높이 2.98m, 불신 높이 1,81m, 대좌 높이 1.17m이다.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앉았는데 광배는 없어졌다. 머리는 둥근 육계와 나발이 올려졌고, 사각형 얼굴이지만 둥근 맛이 있다. 조금 뜬 길다란 눈, 짧고 넓적한 코, 입 가에 미소를 띤 온화한 인상이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짧은 목에 옆으로 그은 삼도는 가슴에 새겨있다. 머리에 비해 좁은 어깨는조금 위축된 자세지만 안정감이 있다. 다리를 틀은 하체는 묵직하여 암정감이 있다. 불상의 뒤까지 표현된 옷주름은 규칙적이면서 평평하게 표현되었다.대좌는 세 부분으로 높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연꽃 봉오리모양의 상좌, 팔각형의 중좌, 두겹의 연꽃잎을 깐 하좌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8세기의 불상에서도 나타나지만, 위축된 자세와 사실성이 줄어든 조각수법등에서 볼 때, 8세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9세기 이후에 형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바로 뒤가 절벽인 것으로 보아 불상 위에 건물은 없었던 듯하며, 자리를 정하는 데에는 땅의 기운을 누르려는 신라하대의 도참사상(圖讖思想)이 작용한 듯하다.

 

화왕산 기슭 관룡산(해발 739.7m) 정상 부근의 용선대에 있는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전체높이 318cm 에 불상 높이 189cm, 좌대 높이 129cm로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722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불상의 팔각형 좌대(座臺) 한쪽 측면에서 불상 제작 연대를 나타낼 가능성이 큰 명문(銘文.새김글자)이 확인되면서 드러났다. 명문은 세 줄에 걸쳐 '開元十../月卄日(?)../成內..'이라는 글자로 잠정 판독됐고, 정밀 판독을 결과 '開元十../月卄五../成明..'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나머지 글자는 마모가 심해 전체적인 맥락을 잡기는 힘들지만 "개원 10년(722년)..월 25일에..(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그 아랫글자들은 이미 깨져나갔으니, '開元十' 아래에는 '開元十' 부터 '開元十九'라는 글자가 올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는 햇수를 의미하는 '年'이나, 이 무렵에 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載'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이다. 개원(開元)은 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서기 722년이다. '개원'(開元)은 당 현종 때 사용한 연호로 개원 10년은 722년이니, 신라로서는 성덕왕 재위 21년째가 된다.

 

이렇게 해서 나이를 잃어버린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빠르면 722년, 아무리 늦어도 731년에는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그동안 이 불상은 막연히 통일신라시대 불상 정도로만 알려졌고, 일부 불교미술사학자는 양식적인 특성에 주목해 9세기 무렵 작품이라는 견해를 제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명문 발견을 통해 이 불상이 제작된 연대가 개원 10년, 또는 개원 10년에서 개원 19년(731년) 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8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또 다른 기준작을 확보하게 됐다. 특히 8세기 전반 석불 중 좌상으로는 제작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 된다. 8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가 알려진 사례는 입상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719년)과 같은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720년) 정도에 불과하다. 8세기 중ㆍ후반 작품으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석불은 석굴암 본존불 좌상과 석남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766년), 김천 갈항사지 석불좌상(758년 무렵)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이 항마촉지인을 한 오른손이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고 무릎 위에서 그친 점은 7세기 후반 작품으로 생각되는 팔공산 군위석굴 삼존불상의 본존상과 동일하고, 부은 듯한 눈두덩과 도드라지게 양각한 대좌 앞면 주름은 감산사 석조미륵불입상과 유사하다. 또 좌대 상대(上臺) 앙련석은 두껍고, 삼엽문(三葉文.이파리 3개)을 기본으로 하는 연화문(蓮花文)을 새겼으며, 팔각형 중대석의 각 면에 위, 아래로 긴 안상(眼狀.눈 모양)인 장식을 표현한 점은 이후에 등장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군위삼존석불이나 경주남산 삼릉계석불좌상 등과 같이 항마촉지인으로 왼손바닥을 벌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번에 명문의 발견으로 경주남산 선방골 본존여래입상의 시무외여원인에서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과 봉화 북지리 마애삼존불의 시무외인 좌상을 거쳐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경주남산 칠불암 마애삼존불과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중간과정의 불상으로 불교조각사에 큰 변동을 준 불상으로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수도에서 먼저 발생하여 자방으로 파급되는 것이지만 삼단대좌양식이 석굴암 본존불보다 먼저 창녕지역에서 나타남으로써 이러한 일반론에서 벗어난 현상으로 여겨진다.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상호

 

 

 

<2017.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