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한양문화권

조선 정원의 백미 - 서울 창덕궁 후원 연경당

蔥叟 2018. 1. 5. 15:50

조선 정원의 백미 - 서울 창덕궁 후원 연경당

 

부용정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애련지가 나오고 그 입구에 불로문이라는 아치형 돌문이 동향으로 서있다. 불로문에는 늙지 않고 젊음을 누리기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불로문을 지나 연경당을 향하다 보면 우측에 커다란 사각형의 연못이 보이고, 그곳에 두 발을 담고 있는 아담한 정자가 하나 보인다. 바로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이다.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인 애련지(愛蓮池)는 창덕궁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애련지 북쪽에 서 있는 간결한 정자가 애련정(愛蓮亭)이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方池)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입수구가 독특한데,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물길을 따라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또한 애련지 서쪽 연경당에서 물을 끌어오는 입수구도 일품이다. 넓은 판돌을 우묵하게 만들어 낙수물을 떨어뜨리게끔 하여 마치 작은 폭포를 연상케 해 그 정취를 한껏 더하고 있다. <동궐도>에 의하면 애련정 옆에 어수당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애련지의 물가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이다, 건물을 받치는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사방으로 평난간을 둘렀는데, 낙양창 사이로 사계절이 변하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애련정과 관련해서는 숙종의 '어제기'와 정조가 지은 '애련정시(愛蓮亭詩)'가 전하고 있다. 애련정은 정면 1간, 측면 1간 이익공 겹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되어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숙종 18년(1692)에 애련정을 지었다고 한다. 애련정은 작지만 매우 간결하고 격식있게 지어졌다. 애련정은 낙양창을 두었는데 애련정의 난간 마루에 걸터앉아 이 낙양창을 액자삼아 애련지와 창덕궁 후원을 바라보면, 마치 화려한 낙양창에 담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 애련정의 낙양창이 창덕궁 후원의 자연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애련지 주변에는 수백년 넘은 단풍나무 몇그루가 있는데 그아름다움은 반도지 주변의 단풍나무 고목과 함께 손꼽을만 하고 바로 옆 창경궁 담장너머에도 멋진 단풍나무가 수십그루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주합루와 영화당 구역을 감싸고 있는 작은 능선을 지나면 골짜기에 연경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 환경은 아름다운 숲과 연못 및 정자 등이 어우러져 이상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우측의 솟을 대문인 장양문은 사랑채로 통하고, 이 문을 지나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경계 짓는 담장이 꺾여 있으며 담장 가운데에 문인 정추문이 있다. 그리고 좌측의 평대문은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담으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나 한번 꺾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 공간구성은 서로 연결된 만(卍)자 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경당이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를 가리킨 것이었으나 지금은 이 건물들을 통틀어 연경당이라 부르고 있다. 사랑채의 오른편으로는 서재 구실을 하는 선향재가 위치해 있으며, 선향재 뒤편의 경사진 언덕에는 화계를 설치하고 제일 높은 곳에 농수정을 배치하였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궁궐지』에는 순조 28년에 총 120칸으로 건립하였다고 기록이 있고,『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순조 27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를 베풀고자 1827~8년(순조 27~8)경 지은 효심이 담긴 집이다. 창건 직후 연경당에서는 효명세자가 신하를 접견하거나 진작례를 거행하였다. 헌종 대 이후에는 익종(효명세자)의 어진과 모훈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1857년(철종 8)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한 동안 빈 집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 고종 대에 이르러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중요한 정치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사랑채 건물은 장대석기단 위로 사다리꼴의 초석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평주 위에는 장여가 도리를 받고 있는 굴도리집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안채는 납도리로 되어 있으나 사랑채는 굴도리로 되어있다는 점과 안채, 사랑채 모두 각기둥을 사용했다는 점으로 조선시대의 남녀유별과 가옥규제에 대한 법령을 충실히 따랐음을 볼 수 있다. 사랑채 평면은 정면6칸, 측면2칸으로서 맨 우측에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4칸은 툇간을 개방하였는데, 4칸 중 우측2칸이 대청이고 좌측2칸이 방이다. 그리고 안채에서 뻗어 나온 온돌방 2칸은 이 마루 뒤로해서 사랑방에 1칸이 연결되어 있다. 안방의 서쪽과 뒤편으로는 사랑채까지 쪽마루가 연결되어 있어 사랑채에서 안채로 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이 경계부분에는 판문을 달아서 개폐할 수 있게 하였다. 평면구성에 있어서는 왼쪽 끝에 누1칸이 있으며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가 대청에 나 있다.

 

연경당은 건물배치와 공간구성 등에서 당시의 유교적 철학이 적용된 궁궐 내 사대부 집으로 당시의 주택과 비교해 볼 수 있는 한국주택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궁전의 조영법식과 기술력으로 건축되어 세련되면서 단아한 세부양식이 궁궐건축 고유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연경당은 조선시대 궁궐 내 사대부 건축으로서 그 가치가 뛰어나다.

 

바깥 행랑 가운데의 솟을대문 장락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있고 건너편으로 중문이 둘이 있는 행랑채가 나타난다. 그 중 우측이 사랑채로 통하는 장양문(長陽門)이며 좌측이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修仁門)이다. 장양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전면에 나타난다. 그 좌측에는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경계짓는 담장이 있고 가운데 통용문인 정추문(正秋門)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그 마당은 담으로 구분지어져 있으나 건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의 평면은 정면 6칸 중 우측 첫째 칸에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4칸은 툇간을 개방하였으며 4칸 중 우측 2칸이 대청이 되고 좌측 2칸이 방이며 좌측 첫째 칸은 마루이다. 이 마루의 뒤로 안채에서 뻗은 온돌방 2칸이 연접되어 있다. 사랑채는 장대석 기단(基壇) 위로 사다리꼴의 방형(方形) 초석에 방주(方柱)를 세우고 있다. 평주(平柱) 윗몸에는 장혀가 도리를 받는 외에 다른 짜임이 없으며 고주(高柱)에는 창방(昌枋) 위로 교창(交窓) 에 별장혀, 도리받침장혀, 도리가 가구(架構)되어 있다. 다만 대청 뒤쪽의 주칸에는 분합 위로 소로를 놓아 도리와 장혀를 받도록 하였다. 대량(大樑)과 퇴량(退樑)의 높이는 같고 대량 위에는 키없는 동자주(童子柱)를 놓아 종량(宗樑)을 받았고 중도리를 얹고 종량 중앙에 제형(梯形)의 판대공(板臺工)을 올려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천장은 대청에서는 삿갓천장, 방에서는 종이천장이다.

 

연경당 사랑채의 좌측에는 책을 보관하고 읽기도 하는 일종의 서재의 구실을 하던 선향재라는 건물이 사랑채를 바라보고 서있다. 선향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에 전면으로 차양이 설치된 건물로 중앙 6칸은 대청이고 좌우 각 4칸이 방이다. 단층의 맞배지붕인 이 건물에서 특색있는 부분은 차양과 측면의 벽체이다. 차양은 가는 기둥을 전면에 8개를 세우고 각 기둥 상부에서 창방을 본 건물에 보내어 그 위로 간단한 지붕을 따로 만든 것이며, 측면 벽체는 벽체의 하단 3분의 1 위치에서 박공 부분까지 벽돌을 쌓고 중앙에 정방형의 기하 문양을 장식한 것이다.

 

내당의 평면은 왼쪽 끝에 누(樓) 1칸과 그 뒤에 2칸의 안방, 그 우측에 중앙대청 2칸, 우측에 건너방 2칸과 다시 마루방 1칸이 있으며 대청에서부터는 전면에 반 칸의 툇마루가 나 있다. 내당의 구조는 사랑채와 거의 같으나 도리가 납도리인 점이나 장혀가 생략된 점이 다르며 주고(柱高)도 사랑채의 그것보다 약간 낮다. 이것은 사랑채보다 건물의 격식을 낮추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내당의 전면과 우측면은 행랑방으로 둘러싸였으며 좌측은 건물 앞뒤로 담장을 쌓아 사랑채와 경계를 이루었다. 후면으로는 담을 두르고 그 뒤에 반빗간을 두었다.

 

▲불로문

 

▲불로문

 

▲불로문

 

▲애련지

 

▲애련지

 

▲애련지

 

▲애련지

 

▲애련정

 

▲애련정

 

▲연경당

 

▲연경당 장락문

 

▲연경당 사랑채

 

▲연경당 사랑채

 

▲연경당 안채

 

▲연경당 안채

 

▲연경당 행랑채

 

▲연경당 행랑채

 

▲연경당 선향재

 

▲연경당 선향재

 

▲연경당 농수정

 

▲연경당 농수정

 

▲연경당 농수정

 

 

 

<2017. 10. 29>